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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Apr 17. 2024

경험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_나도 해봐서 안다는 엄청난 착각

“선생님은 애 안 키워봐서 모르셔서 그래요.”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린다. 왜 미혼의 초등교사들이 학부모에게 듣기 싫은 말로 손꼽는 이유는 알겠다.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을 앞세워, 입을 틀어막는 불통의 기운이 확 느껴진다. 시작부터 벽을 치는 사람에게 어떤 조언을 한들 귓가에 닿을 리가 없다.       


물론,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 있기는 하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열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에게 오롯이 의지하는 한 생명을 돌봐야 한다는 무거운 굴레도, 내 몸뚱이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부자유의 삶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낯선 세계였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아무래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엄마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몇 년 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육아를 멀리서 보면 모두 비슷해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육아의 모양은 천차만별이란 것이다.       


자궁 경부가 짧아 임신 내내 누워 있어야 했던 사람도, 입덧이 심해 일상생활조차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초산임에도 막달까지 평소처럼 일하다가 병원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짧은 진통만 겪고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      


임산과 출산과정일 뿐일까. 까다로운 아이 때문에 2년 넘게 통잠 한 번 자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자고 잘 먹는 순한 아기 덕에 힘든 줄 모르고 육아를 한다며, 이래도 되는 건지 오히려 되묻는 엄마도 있었다.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경험에 맞장구치고 싶었던 만큼,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다.      


언젠가 딸 둘 엄마가 아들 셋을 키우는 집에 놀러 갔었을 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얌전히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딸아이들 앞뒤로 아들 셋이 뛰어다니며 야생동물과 같은 비명소리를 지르는 걸 보더니, 혀를 차며 딸 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나도 아이 둘 키우지만 어떻게 애를 키웠기에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남긴 채.      


인간이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통로 대부분은 경험이라는 프레임을 거친다. 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면서, 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몰랐던 세계로 한 발짝 들이는 열린 문이거나, 삶의 지경을 좁히는 닫힌 문이거나.      


한 두 번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모든 것 다 아는 듯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쉽게 꺼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옅은 한숨이 배어 나온다. 길 너머 더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보지 못한 채, 그것이 전부인양 우리를 속이는 경험의 철창 속에 갇힌 모습이 너무나 서글퍼서.      


자기의 경험에 의거하여, 함부로 평가하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을 보며, 혹시 나는?이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경험이라는 철장 속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에 얄팍한 경험에 의존해서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지금 느껴지는 찜찜함은 이제까지 경험에 속는지도 모른 채 문을 닫고 안주한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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