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오피스 빌런 관찰기 (1)
점심시간을 앞둔 어느 날.
팀장이 오래간만에 선임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
웬일이래. 또 위에서 이러저러한 지시사항이 있었나 보다.
자리에서 꾸역꾸역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어디에 앉아야 L선임의 정면을 피할 수 있을까.
구석 자리의 의자를 슬며시 끌어다 앉았다.
오늘의 관전포인트는 L선임의 하늘을 찌르는 시건방이 어디까지 갈건인가다.
지난번에 호되게 당한 팀장이
과연 오늘은 어떻게 어버버 당할지도 또 다른 관전포인트.
지난 회의 때, 팀장이 급한 일 하나 해야 한다고 L선임에게 말을 꺼냈다가
저연차 직원보다 손 느리다는 걸 본인만 모르는 L선임이
최소 몇 주, 며칠 전에는 알려줘야지 갑자기 이러면 못한다고 뻗대면서,
팀장이 그거 하나 업무정리 못하냐고 물어 붙여댔더랬다.
나 님이 일하기 좋게 입맛에 맞춰 가져다줘야 하는 게 팀장 역할인데
그것도 못하냐고 지적질을 해대는데,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었다.
내가 한 디자인은 항상 진리고,
자신보다 디자인 경력 오래되지 않았으면 수정에 ‘수’ 자도 못 붙이게 하면서
답답하면 니들이 나한테 맞추라는 식으로 나오는 L선임.
과연 오늘은 뭘 가지고 짜증을 낼까. 이제는 약간의 호기심까지 일었다.
지난 업무에 대한 복기를 하는 도중,
긍정적인 평가에 이어, 홍보물에 기간이 잘못 나간 건에 대한 말이 나왔다.
오호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새로운 시도들이 많아서 긍정적인 평가들이 많아요. 수고했어요.
다만, 이번에 처음 하다 보니 나도 그렇고 모두 놓친 부분이 있었는데,
다음부터는 신경 써서 합시다. “
문제는 있었지만 특정인에게 책임전가하지 않고
소위 나이스하게 넘어가자는 의미를 담아 팀장이 말했다.
“제가 다 보여드렸잖아요. 저희가 놓친 건 아니죠.”
“나도 놓친 건 맞는데 서로 다 놓쳤다는 거지.”
“저희는 하던 대로 했어요.”
역시나 L선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이번에 처음 하다 보니 실수할 수도 있는 거 이해하는데, 다음부터 그러지 말하는 거지.”
“저는 처음이지만 부하 직원들은 전부터 하던 일이에요. 처음 해서 그렇다고 하시면 안 되죠.”
처음 해서 그렇다는 말이 마치 처음 참여한 자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들렸는지
L선임이 바들바들 떨며 대꾸하기 시작한다.
오늘도 몰리는 팀장.
과연 어버버 하면서 넘어갈 것인가. 두둥.
“그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기간을 틀린 거지? 처음 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많이 해봤는데 왜 틀렸다고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
오호. 웬일이래.
팀장이 처음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자신이 틀린 것도 인정하기 싫고.
처음이라서 그랬다는 말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들려서 더더욱 인정하기 싫고.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주장하려던 L선임은
팀장의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팀장의 말 한마디에 발발 떨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까지 내가 결정하고야 말겠다는
L선임의 오만한 자의식이 부른 낭패였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L선임의 성향은 디자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보는 사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눈에 예쁜 디자인만 내놓는다.
현장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지만 바꿀 생각은 1도 없다.
왜냐? 내가 니들보다 디자인은 오래 했으니까.
내가 니들보다 전문가인데 함부로 지적질이냐 이거다.
공 차는 게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던지 딱 그 마인드다.
그러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강해서
나 잘했지? 그러니까 빨리 칭찬해 달라는 듯이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기 바쁘다.
한 마디로 잘 된 건 내 덕분이고
잘못된 건 내 탓이 아니라는 거다.
차마 인정할 수 없을 테지.
자신의 부족함을.
그렇게 믿어야 할 테다.
스스로 불안하니까.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스스로와 결과물을 동일시하는 모습이
전에는 엄청 눈꼴셨는데,
요즘은 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 나도 안다.
자신의 한계를 깔끔하게 인정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멋진 결과물을 볼 때마다
내 결과물의 초라함과 부족함과 마주칠 때마다
좌절감을 느끼며 도망가고만 싶어 진다.
깨지고 부서지며 알게 됐다.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나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결과물을 내는 능력을 가질 순 없다는 걸.
대신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좌절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할 용기뿐이라는 걸.
오늘도 허상 속 자신의 실력에 취한 채
사뿐사뿐 사무실을 거닐며 인정욕구를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오피스 빌런 그녀. 좀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