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어렵다'는 이유가 기술이나 기법이 아니라, 주로 ‘의미’에 대한 부분이라 그렇다.
멋진 사진을 찍고도 공허함을 느낀 나머지, 의미 붙이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이다.
사실 그 문제는 매우 난해하다.
깊은 인문학적 지식이 요구되고, 세상과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도 필요할 것 같다.
더욱이, 없었던 걸 새로 만들어서 갖다 붙이려다 보니, 기발한 창의성까지 요구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 때 만들어야 하는 건 사진이 아니라, ‘텍스트’다.
그건 상당부분 지적(知的)이며, 성질상 정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의 본질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지적(知的)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의미심장한 단어를 고르는 일...
자기감정을 (신파조가 아닌) 세련된 문장으로 작성하는 것.
그건 우리 전공도 장끼도 아니고 취향과도 거리가 멀뿐더러 애초에 관심거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뜻밖의 난제를 만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공간의 기술적인 가치)
'꽃을 보지 말고 배경부터 찾아보세요!'
한 야생화 사진동호회에서 꽃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고수는 그렇게 조언했다.
예쁜 꽃만 열심히 찾아 다녀봤자 '허탕'이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접근하면 좋은 사진을 찍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부연설명을 해보면, 아마 이런 얘기가 될 것 같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아름답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사진이 되는 건 아니다.
사진은 세상을 ‘네모난 틀‘ 안에 집어넣는 작업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틀’에 맞지 않으면 좋은 피사체가 될 수 없다.
틀에 들어가서 그 안의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만 사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틀 안의 공간이 곧 배경이다. '배경'은 '사물과 틀 사이의 공간'이고 틀의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그 공간이 어떻게 채워지는 지는 사진의 모양새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피사체가 먼저냐 배경이 먼저냐?'는 질문에서 첫 번째 조건이 ‘배경’이고, ‘배경부터 검토하는 게 올바른 순서’라는 생각에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먼저 좋은 배경이 될 만한 장소를 찾은 다음, 거기 꽃이 피어있는지 살펴보는 게 '맞는 접근법'이라는 조언에 일리가 있다.
조언은 야생화 사진뿐 아니라 길거리사진을 찍을 때도 잘 먹힐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드는 배경을 먼저 고른 다음, 피사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피사체를 쫓아다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종종 써먹는 수법이다. 상황에 따라 약간 차이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길거리 사진에서도 피사체를 탐색하기 전에 먼저 배경부터 검토하는 게 올바른 순서인 게 맞는 것 같다. 아무튼 어떤 사진이든, 같은 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틀림없이 성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베티 에드워즈>의 '오른쪽 두뇌로 그림그리기' 라는 책에서는 초보자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비법을 소개한다. 비법 중 하나는 모델이 되는 사물이나 그림(흑은 사진)을 ‘거꾸로 놓고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리게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건 사람들이 그림을 못 그리는 이유가 그림을 그릴 때,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그릴 때, 우리는 ‘얼굴은 둥글고, 눈과 코는 어떻게 생겼다’는 식의 기존지식을 이용해서 그리려고 든다. 그러면 그리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 않게 되고, 그 때문에 '잘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존지식을 이용해서 ‘아는 대로’ 그리려고 드는 주체는 사람의 두뇌 중에서도 '왼쪽 반구'가 하는 역할이다. 과학에 의하면, 뇌의 왼쪽 반구는 언어적,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계산에 능한 반면, 오른쪽 두뇌는 직관적 감성적이며 공간과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따라서 그림을 그릴 때는 오른쪽 두뇌를 활용하는 게 유리하고, 왼쪽두뇌의 스위치는 잠깐 꺼두는 게 좋다.
그림이나 사물을 거꾸로 놓으면, 눈앞에 보이는 게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보이는 건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닌, 알 수 없는 형태뿐이니, 기존지식을 써서 논리적인 사고를 하려 드는 왼쪽두뇌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게 도대체 뭐야! 말도 안 되잖아!”
그래서 포기하고 오른쪽 두뇌에게 바통을 넘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 보면, ‘몰라보게 그림 솜씨가 좋아졌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장담하건대, 완성한 그림을 돌려서 바로 놓고 보면, 누구라도 자기가 갑자기 화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그 책에서는 '공간을 보면서 그리는 방식'도 소개한다. 사물을 보지 말고 테두리와 사물의 윤곽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을 보면서 그리면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 위에 사람 모습의 석고상을 그리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석고상을 그리지만, 석고상을 보는 대신, 배경(혹은 공간)을 본다. 물론 배경이나 공간의 형태는 테두리(혹은 틀)에 의해 생겨나므로, 틀의 존재를 인식해야 공간의 형태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배경을 보려면 (상상력을 이용해서) 틀을 먼저 머릿속에 떠올려야 한다.
그 틀과 석고상의 가장자리, 윤곽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곧 배경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공간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물론 공간은 (거꾸로 놓은 그림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의 형상’이 아닌, 아무 의미도 없는 형태다. ‘거꾸로 놓고 그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 없는 형태’를 그리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얼굴, 눈, 코, 입 등 형상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지식이 무위로 된다. 왼쪽 두뇌는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작동을 멈추고 오른쪽 두뇌에게 컨트롤을 넘겨버린다.
그 드로잉 책이 제시하는 비법의 핵심은 '이것이 무엇이다'라는 식의 기존관념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오른쪽 두뇌가 나서면서 그림을 잘 그리게 된다는 얘기다. 한데 기존관념을 잊는 것이 의지만으로는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거꾸로 놓고 그리거나 배경을 보고 그리는 식의 방법들이 나온 셈이다. 실제 그렇게 해 보면, 그림을 그릴 때 '이건 눈이야' '이건 코야' 식의, 어떤 선입견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선과 면과 그것들이 이루는 형태와 각도와 길이 같은, 의미 없는 기하학적 요소들뿐이고, (새삼스럽게도) 처음부터 전부 하나하나 보면서 그림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어느 선이 어느 면의 어느 부분과 연결되는 지 어떤 각도로 연결되는지를 일일이 눈으로 보면서 도형들의 관계를 파악하느라 극도로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사진찍기에도 그 드로잉의 원리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꽃을 보지 말고 배경부터 보라’는 고수의 조언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제대로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상투적인 눈으로 보면, 효율적일지언정 정확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기존지식을 이용해서 상투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드는 것은 왼쪽두뇌의 작용이다. 그래서 마치 처음 볼 때처럼 제대로 보려면, 왼쪽두뇌가 작동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 ‘스위치를 끄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피사체를 보는 대신, 그 경계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배경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편견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되고, 네모난 프레임 안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예측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배경부터 보라’는 말의 취지는 물론 다분히 회화적 관점이다. 그 때 중요한 건 피사체가 아니라 ‘그림 혹은 사진’이다. ‘무엇이 찍혀 있는가‘ 보다,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는 굳이 ‘상상의 틀’을 만들 필요도 없다. 뷰파인더나 LCD모니터를 볼 때, 사진 프레임과 피사체의 윤곽 사이에 있는 배경의 형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충분하다. 그러니 굳이 ‘배경 운운’할 필요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비법의 핵심은 '이것은 무엇이다'식의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관념들을 잊고,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걸 볼 수 있고,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중요하다’든지, ‘무엇이 기념이 된다’든지, ‘무엇이 의미가 있다’는 식의 상투적인 관념의 틀을 벗어나서 모든 것을 동등하게 놓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귀한 야생화를 찾아 다닐 필요가 없고, 기념이 되는 사물이나 의미 있는 장면을 찍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인문학적 의미)
내가 아는 어떤 늙은 아마추어사진가는 오랜세월 사진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사진의 정의를 이렇게 말했다.
‘사진은 사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시각(視覺)과 인문학적 지식으로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
나는 이 말이 사진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다 실패하고, 마지못해 내린 궁색한 결론인 것 같아서 서글펐다.
아마도 ‘사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시각‘이 만들어내는 것은 '형식미가 뛰어난 사진'일 것이다. 그건 카메라의 기계/광학적 원리를 습득하고, 빛을 교묘하게 활용해서, 세상을 네모난 틀 안에 조화롭게 담을 줄 아는 눈을 말한다. 그런 눈을 열어 세상을 탐색하면, 보는 사람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다. 한데 그렇게 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찍는 사진은 앞 뒤 맥락이 다 끊어지고 당초 카메라 앞의 그 현실에서 분리되어 의미를 담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그는 사진만으로는 의미를 느끼기 어려웠고, 자신이 찍은 공허한 사진에 의미를 붙일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진을 해석해서 의미를 부여하려 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문학적 지식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사진가의 인문학적 지식이 높을수록, 더 근사하고 더 난해한 의미를 붙이는 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진의 의미는 세련되고 기발한 언어(텍스트)로 전해지며, 남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쓸 수록 더 멋지게 보이는 경향도 있다.
피사체를 보는 대신 배경부터 보는 게 사진을 찍을 때 더 유리하고 거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도 있다. 그건 ‘공간’이 가진 의미를 ‘기술적인 측면’에서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관점에서 프레임의 관점으로 시선을 옮겨서 공간을 바라보면 더 잘 볼 수 있다. 그 때 보는 건 전체적인 ‘구성’이고, ‘사진(사진 그 자체)’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호소하는 ‘보기에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얘기다.
역사나 문화는 일단 접어두고,
상투적인 가치평가도 유보하며,
앞뒤맥락조차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눈을 열어 세상을 다시 본다.
세상은 점과 선과 면과 도형 그리고 빛의 명암이 빚어낸 형식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사진 프레임에 담기는 건, 아마도 구성상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한데...
그렇게 해서 얻은 멋진 그림조각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그 부분이 문제로 남는 것이다.
공간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도 있다.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의미’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사진작가는 ‘공간’에 대한 관념을 매우 서정적으로 해석해서 작품에 활용했다. 그는 ‘대상이 없는 공간’에서 특별한 정서를 느꼈던 것 같다. 대상이 사라지고 없는 공간에는 그 흔적과 체취가 남는다는 것이다.
[ 시각예술에서 공간이란 대체로 어떤 대상물을 품은 배경으로서 존재해 왔다. 그러니 존재했던 ‘오브제’가 사라진 공간의 내부를 사진에 담는다면 내가 찍은 것은 ‘오브제의 부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물렀던 오브제가 남기고 간 흔적을 감싸 안은 공간 그 자체의 체취에 매혹되었고, 공간의 안쪽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대상물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와 그를 감싸고 있는 배경을 관찰하라고 강조했던 그 옛날 <뷔어만> 교수의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그 존재감을 찾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바쳤던 기억과 함께 이 과제는 내게 여전히 진행형의 숙제로 남아있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247) ]
'대상물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와 그를 감싸고 있는 배경을 관찰하라'
사물의 형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 경계와 배경 사이의 공간에 집중하면 된다. 윤곽선은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텅 빈 공간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면, 보다 쉽고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 그의 [뷔어만] 교수는 아마 드로잉 수업에서 그런 원리를 설명했던 것 같다. 그건 <베티 에드워즈>의 책에도 나와 있는 드로잉 비법과도 비슷하다.
‘제대로 보려면 대상을 보지 말고 배경(공간)을 보라!’
교수의 조언은 분명하고 실제적이다. 그건 은유도 아니고, 어떤 철학이나 함축된 의미가 담긴 말도 아닐 것이다.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필요한, 실용적인 팁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성이 빼어난(?) 사진가는, 교수의 조언을 듣고, 색다른 방식으로 배경(공간)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사물을 볼 때 배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간에 더욱 주목하게 되면서, 그는 점차 ‘빈 공간’에서 특별한 의미를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배경(공간)을 ‘어떤 존재의 이면에 남겨진 자리‘로 해석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공간을 통해서 사물의 존재감을 느끼는 일’로 관념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빈 의자는 누군가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로, 빈 방은 누군가 떠나간 공간, 빈 상자는 무언가가 들어있었던 공간, 빈 그릇은 그 안에 담겨 있었던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진가는 ‘공간’을 자기 작품의 피사체로 삼기로 마음을 먹는다. 공간을 찾아내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대상이 없는 공간을 대할 때, 그는 자기 마음이 대상과 공명하는 상태를 느낀다. 공간을 어루만지거나 그 자취를 훑으면서 존재를 상상하다 보면 체취조차를 느낄 수가 있다.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흔히 갖게 되는, 상실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이 마음속에 흐른다.
(공감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가 느낀 그 정서가 사진에 표현될 수 있도록 어떤 솜씨를 발휘한다. 그리고 사진가는 내심, 자기가 사진으로 표현한 그 정서를 사진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말하자면 대상을 바라볼 때, 자기 마음속에 일어났던 공명이 사진에 실려서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대상과 사진가 사이에 있었던 그 공명의 입자는 사진에 실려서 남들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었다. 최소한 내 경우에는 그랬다. 나는 작가가 의도했던 공간의 정서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설명을 읽고 이해는 했지만 정서적으로는 감응할 수 없었다. 한데 그래서 이게 단지 내 문제일 뿐인 걸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유독 사진에서는 ‘어떤 느낌’을 잘 느낄 수 없었다. 갤러리에 가서 어떤 사진 앞에 섰을 때면, 내가 어떤 것을 ‘느껴야만 한다’ 며 누군가 사진을 보는 내 등 뒤에서 강하게 채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그럼에도 나는 거의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느낄 수 없었기에, 나는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알아보려고, 다시 이것저것 따지면서 분석을 시작하곤 했다. 사진가가 느꼈다고 주장하는 것을 나는 느끼지 못했으니,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분석과 추론은 나처럼 정서가 메마르고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다.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항상 부지런히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려고만 들었다. 최소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지 아니면 남들이 가식을 떨고 있는 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공명의 입자는 어떤 식으로, 혹은 어떤 모습으로, 사진에 담기게 되는 걸까? 아무 단서 없이, 오직 (빈 상자의 내부나 차가 없는 주차장이 찍힌) 사진만 보고서도, 사람들이 그런 정서를 쉽사리 읽어낼 수 있을까? 나는 그 부분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그 사진들은 다른 조형예술작품들과 같은 ‘미적 체험의 대상’ 으로는 충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그런 메시지마저 전달될 수 없다면 굳이 남들에게 보여줄 이유도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대상과 사진가 사이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그 ‘공명’은 사진을 타고 날아가서, 마침내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는 걸까? 사실 그가 쓴 글을 읽기 전까지, 나는 빈 상자 곽 안쪽이나 차가 없는 주차장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서 그와 같은 정서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결국 ‘공명’의 핵심은 그의 사진이 아닌 그의 글이었던 셈이다. ‘공명’은 사진에 실려 있는 정서가 아니라, 사진 아래 붙은 제목이나 사진가의 말을 통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글을 읽고 나서도 나는, 이해는 했지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정작 사진은 글과 같은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심이 들었다. 풍경사진의 ‘노골적인 아름다움‘처럼, 직접적이고 단순한 메시지라면 모르지만, 깊은 사유 끝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그리고 사진가의 개인적 경험과 뒤섞여서 얼버무려진, 그런 정서적인 울림 같은 것도 사진에 담길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만약 글을 통해 (공감해 줄 것을) 호소하는 방법뿐이라면, 사진가는 열심히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니라, 열심히 (글쓰기나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혹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진가들은 ‘중요한 건 사진이 아니라’는 식의 모호한 말을 흘리는 게 아닐까? 결국 나는 (야비하게도) 이런 의심까지 품게 되었다. 사진가들은 관객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눈치 빠른 관객들이 제목이나 전시회 팸플릿에 적힌 초대의 글을 읽고 (예의를 차리려고) 공감하는 척하는 게 아닐까? 결국 사진이란 일기장처럼, 혼자만의 독백일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나는 작품에 제대로 공명하지 못하는, 유난히도 내 메마른 내 정서를 탓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