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이른 봄에 집부근 개울가에서 버들강아지를 만나는 일은 생략하고 그냥 넘어갔다.
조바심을 치며 봄을 기다리다가는, 너무 성급하게 나서는 바람에, 자주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던 일이다.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시내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횟수도 줄어든 것 같다.
그건 기대감에 들떠, 내 행운과 순발력을 시험하는 일이고, 제일 좋아하는 사진활동이다.
장미화단은 여전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조금씩 변화를 느낀다.
사진을 찍으러 나서는 발걸음이 점차로 뜸해진다는 점
어께에 멘 카메라 가방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점.
햇볕이 뜨거운 화단에서 버티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꽃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그대로인지, 한 번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 부분도 약간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제일 먼저 늙는 부분이 ‘감정(感情)’이라는, 어떤 노인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장미(2024년 올림픽공원 장미정원에서)
요즘은 여름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겨울외투를 세탁해서 장롱 안에 보관해야겠다.’고 막 결심을 하려던 차에 문득 봄이 물러가고 여름 더위가 와버렸다. 이른 더위 탓인지, 올해도 장미꽃은 피자마자 금세 너덜너덜해졌다. 이제 막 시작되나 싶었는데, 마치 장미계절의 막바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만개해버렸다. 화단에 내리 쪼이는 한 낮의 햇볕이 꽃잎을 태워버릴 듯이 뜨거웠는데, 아마 그 탓에 그렇게 되었지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을 배경삼아 기념사진이나 프로필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 경우에는 꽃의 세세한 상태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장미정원에 찾아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꽃을 사진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배경으로 바라보는 경우다. 그러니까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꽃을 배경 삼아) 인물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는 셈이다. 물론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폰으로 셀카를 찍는다거나 또는 사진의 구도를 가늠해 보았을 때 그리고 초점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추측을 해보면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다들 꽃밭에서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이나 카톡 프로필에 올리려는 것이다. 그 사진 안에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꽃을 주인공 삼아 사진을 찍으러 온 걸로 보이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사진가가 아니라면, 아마도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들일 것이다. 주로 중년여성이나 할머니들로, 꽃 앞에서 자지러질 듯 탄성을 지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는, 원래 괄괄한 성격이었지만 세월이 다소곳하게 다듬어 놓았을 법한 남자 노인들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남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들면서 그렇게들 변한다고 한다. 다들 카메라나 휴대폰을 꽃송이에 바싹 갖다 대고 진지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앵글과 프레임을 감안했을 때, 틀림없이 그 사진 안에는 주인공이 된 장미꽃의 모습이 담겨있을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휴대폰으로 게걸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미화단을 맹렬하게 건너다니는 모습에서 탐욕스러워 보일 정도로 강한 열정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장미꽃에 바싹 갖다 대고 한 송이씩 일일이 사진을 찍었는데, 마치 정원의 꽃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부 다 찍는 게 목표인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찍은 사진과 다음에 찍은 사진에서 어떤 차이점을 발견했기에 그렇게 꽃송이마다 일일이 사진을 찍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대체 그 많은 사진으로 뭘 하려는 건지도 무척 궁금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사진’을 갖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주로 사진 속에 담긴 ‘대상’을 갖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는 내면의 동기는 ‘피사체를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얘기다.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거실에 걸어 두고 싶어 하고 장미꽃이 그려진 사진이 아니라 그 꽃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피사체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연장이며, 피사체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잠재적 수단이 된다. 하지만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우리는 흔히 그리운 사람의 사진을 보며 사진 속 얼굴을 쓰다듬기도 한다. 장례식에서는 죽은 사람의 사진을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한다. 물질적으로 사진은 인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때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진이 ‘실물의 대체품’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막연히 ‘그 안에 혼(魂)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절실함 때문에) 그렇게 믿기로, 스스로 동의했을 수도 있겠다. 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거나, 좋은 것을 항상 옆에 두고 보기 위해 사진을 찍는 셈이다.
[ 회화는 그저 피사체를 재현하거나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사진은 피사체와 닮았을 뿐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봉헌물이다. (수전 손택. on photography) ]
영원한 건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기에, 저마다의 욕망에 따라, 무엇이든 사진의 피사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광기어린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열정의 바탕에는 필시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터였다. 꽃은 곧 질 것이고 가져갈 수도 없으니, 사진을 찍어가는 셈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이 아니라 ‘꽃’을 가져가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래! 이제 한 송이만 더...” 라고 되뇌며, 기어코 한 아름 가득 채워가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가들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꽃에 접근하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배경도 아니고 꽃도 아니다. ‘둘 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즉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성질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굳이 말한다면, ‘사진’일 것이다. ‘작품’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아무튼 그가 원하는 ‘작품?’은 그 화단에는 아예 없었거나 아니면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어있었을 것이다. 사진가는 그것을 만들거나 찾아내서,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
겉으로 보기에, 사진가란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세계를 면밀하게 관찰해서 아름다움(美)을 찾아내려고 기를 쓰는 존재들이다. 그림을 한 장 뽑아내려는 것이다. 장미화단도 예외가 아니며, 그래서 피사체에 접근하는 자세도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주로 사진의 소재로서 어떤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지도 따로 확인을 해 봐야 할 문제다. 좀 더 전문적인(또는 미적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는 꽃을 가져가고 싶다거나 배경이 필요해서 라기보다, ‘작품’을 만들어가려는 것이기에 약간 다른 관점에서 꽃을 바라본다.
먼저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좋은 빛이 드리운 곳에 피어있는 완벽한 꽃송이를 찾아낸다. 네모난 뷰파인더를 통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색과 명암의 구성을 검토하고, 선의 흐름이나 규칙적인 패턴과 같은 회화적인 특성에 주안점을 둬서 프레임과 앵글을 결정한다. 미적 취향에 부응하려면 명암의 대비나 광학적 원리에 따른 원근법과 심도를 이용해서 화면을 되도록 단순하게 구성해야한다. 통일성에 방해가 되는 산만하고 어수선한 요소는 약화시키거나 배제해야 한다. 그렇게 마냥 조형미에 매몰되어 오로지 멋진 그림을 얻어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건 단지 그냥 ‘시작’일 뿐이다.
나는 카메라를 그저 (붓이나 연필같이) 그림 그리는 도구로 여기고, 그렇게 다루는 건 거의 '카메라를 모독하는 태도'라고 본다. 카메라는 그 보다 훨씬 더 유능하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메라는 일종의 ‘확장된 시각’이며 ‘눈의 연장’이다. 예를 들어, 근시안인 사람이 착용하는 안경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근시안인 사람이 안경 없이 지낸다면 많은 걸 놓친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칠판에 적힌 글씨를 읽지 못할 뿐아니라 야외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즐길 수도 없을 것이다.
시각을 완전히 잃은 사람들의 삶의 질이 어떨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각을 반쯤 잃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것은 어떨까? ‘본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비롯해서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카메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시각능력을 확장시켜 준다. (정상적인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도 관심을 갖고 볼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사진가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진이 재현해 놓은 현실은 그 사진에 충실해지기 위해서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다. 1901년 15년 경력의 아마추어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자연주의 문학의 주창자 에밀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수전손택. on photography) ]
사진가는 자기 앞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
첫째. 네모난 프레임에 가둬서 본다. 그러면 시야를 좁혀서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집중해서 볼 수 있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무심코 보는 것은 때로 안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관심을 갖고 보면, 비로소 알게 되고, 알게 되면서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주변에 얼마나 흔한가? 사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도 액자에 넣어서 골똘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달리 보일 것이다.
둘째. 다양한 조건과 여러 상황에서 바라본다. 같은 대상이 지니고 있는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환경조건의 변화(날씨와 계절과 빛이 비치는 상태와 피사체가 놓인 장소나 위치)와 대상 그 자체의 변화(포즈나 표정, 시간의 흐름과 움직임에 따른) 그리고 바라보는 각도와 거리와 시점(視點)을 바꿔서 보면 사물의 모습은 매우 다르게 보인다. 따라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걸 보게 되면서 세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고, 진부해서 싫증나던 것들조차 신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셋째. 사진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 사진가는 피사체(현실의 사물이나 사건사고)를 보고, 그것을 사진(조형이나 이미지)으로 다시 보게 된다. 둘 간의 차이를 분석하고 음미하다 보면, (이미지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보게 되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 전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결과적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카메라를 들기 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현상들이 일어난다.
<도로시아 랭 (미국. 사진가)>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 법을 가르치는 도구’라고 말했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통해서 ‘보는 법’을 배우는 셈이다. ‘배움’이란 ‘몸에 익히고 머리로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보는 능력이 향상되면 그 부분이 다른 다양한 분야의 배움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 덕분에 시각적 기능이 향상되면, 다른 것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된다. ‘시각(視覺)’만 배우는 것도 아닌 셈이다.
사진가들은 피사체가 된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관찰함으로써, 사물과 (그것이 놓인) 세계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알게 된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걸 보게 되고 전에 몰랐던 모습을 알게 된다. 좋아했던 것을 더 많이 좋아하게 되고, 관심 갖지 않았던 것에도 새삼스레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인간과 자연에 내재된 비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서, 삶이 전보다 더 풍요로워진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극도로 심각한 완벽주의자이고 욕심쟁이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웬만한 아름다움에는 만족하는 법이 없고 작은 흠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사진의 피사체가 화가의 머릿속 그림(繪畵)처럼, 늘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이상(理想)과 현실간의 괴리에서 비롯된 갈등은 거의 불가피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사진은 그런 갈등 끝에 타협이 성사되면서 태어난 결과물이다. 현실과 타협을 할 줄 모르면 사진가로 남아 있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점차로 사진을 윤색하고 수정하는 데 치중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사진가들 못지 않게 (아름다움에 관한한) 탐욕스러운 완벽주의자라고 믿는다. 하지만 카메라에 매크로렌즈를 끼우고 꽃송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완벽하진 않더라도) ‘타협이 가능한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었다. 질서정연한 패턴을 이룬 채 여러 겹으로 포개진 꽃잎을 비집고, 안에 들어가서 보면, 리드미컬한 선이 있고, 탐스러운 형태와 아름다운 색채와 관능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질감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때 나는 기꺼이 설득 당했고, 제법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무엇보다 장미꽃향기를 좋아한다. 공기에 섞여서 흩어지기 전에, 향기를 맡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대한 꽃에 가깝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장미꽃의 정수(精髓)는 꽃잎 사이에 숨어있는 것 같다.
시든 꽃송이에 실망한 나머지, 궁여지책 끝에 옹색한 변명거리를 하나 찾은 것뿐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섣부른 체념이나 회피’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시든 꽃이 가득한 장미화단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방법이 어떤 것이든, (좋은 사진을 향한) 열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면, 그런대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작품’이라는 거창한 개념은 부담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에는 더 이상 사람이 덧댈 아름다움은 없는 것 같다. 한편, 자연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사진가가 기교를 부려서 치장할 필요가 없고 따로 메시지를 덧붙여서 오염시킬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오로지 향기를 즐기면서, 열심히 보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