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사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 내가 찍은 사진에는 나의 감성과 자아가 반영되어 있다. 바다를 찍으려 한다면 그 바다는 나에게 특별한 것이고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 순간 촬영자와 대상물 간에 긴장과 교감이 발생하고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나만의 대상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새로운 영상언어를 찾아내는 것은 사진가가 끝까지 지고 가야할 숙명이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
그러나...
느낀 것이 사진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심지어, 본 대로 찍히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흐르면, ‘찍히는 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 ‘찍힌 것’을 두고 ‘내가 느낀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사진은 내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을 만들어낼 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 속 그림(心象)을 사진 찍어주는 카메라는 없다.
사진의 중심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피사체와 카메라다.
카메라가 한 일을 두고, 자의적인 해석을 추가하는 건, 위험하고 또 겸연쩍은 일이기도 하다.
만약...
사진가가 '마음속 그림을 만든다'는 환상에서 (끝까지) 깨어나지 못하면, 그는 결국 그림(繪畵)을 그리게 될 것이다.
심상(心像 image)이란?
심상(心像 image)은 감각기관에 대한 자극과 무관하게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映像)을 말한다. 즉 눈으로 보지 않고 (혹은 본 것과 무관하게) 마음속에 떠오른 영상이다. 그러나 심상은 비단 시각에 제한된 개념은 아니다. 이를테면 시를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을 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시나 음악의 운율이 떠오르는 것도 심상에 속한다. 뿐 아니라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좋은(혹은 나쁜) 느낌 같은 것도 종종 심상(image)으로 불린다. 아무튼 심상을 시각적인 부분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마음이 그려낸 그림’ 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의 시각기억은 사진을 가득 담아놓은 구두상자가 아니다. 각각의 사진들을 확인하지 않으면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기억 상들은 명제로 된 상부구조 안에 분류되고 체계화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래픽 파일들이 하나의 큰 문서나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첨부 지점들과 연결되어 있는 하이퍼미디어와 비슷할 것 같다. 시각적 사고는 종종 심상의 내용물 자체에 의해서보다는 우리가 상을 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개념적 지식에 의해 더 강하게 작동한다.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 ]
과학적 서술에 의하면 마음속에 그와 같은 그림(심상 혹은 이미지)이 그려지는 원리는 이렇다. 우리는 기억 속에 많은 그림조각들을 가지고 있고, 어느 순간 조각그림들은 하나로 엮여서 일련의 전체그림이 되어 머리에 떠오른다. 물론 그 그림 조각들은 과거 경험을 통해서 수집해 둔 (두서없는) 파편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실마리로 엮어서 전체그림으로 떠올리는 것은 주로 '관념'이 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상적인 내용은, 관념이 기억 속의 파편(그림조각)들을 엮어서 하나의 의미 있는 이미지로 만들 때, 과거가 아니라, 현재 내가 가진 개념적 지식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현재의 내가 활약해서 완성된 그림(심상)을 만들어 낸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심상은 실제 경험과는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내용이 빈약한) 파편적 그림조각인 과거의 기억을 엮어서 내용을 채우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현재의 나'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추측이지만, 실제로 경험을 했던 과거 그 시점에 비해, 심상을 떠올리고 있는 현재의 나는 훨씬 더 성숙했거나 똑똑해졌고, 처지나 감정상태가 당시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흔히들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때는 행복했었지!'라는 탄식은 착각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건 다소 엉뚱하고 불가능한 소망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심상사진이란?
심상 즉, 이미지는 ‘기억을 마음속에 재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원래 기능은 감각적 체험을 되살리는 것이지만 별로 믿을만한 것은 못 된다. 먼저 말했듯이, 기억은 '현재의 내'가 떠올리는 것이고, 그 체험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을 나와 내 생각에 의해 오염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상정해 보면, 사물을 직접 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그렸다면, 그 그림은 곧 ‘내면의 풍경, 즉 심상이 실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상사진...
'심상사진'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진의 한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인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심상사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일반적인 표현을 그대로 옮겨 써 보면 이런 식이다.
'개인의 내면적 풍경을 대상과 등가(等價)를 이루도록 표현한 사진'
'내면적 풍경'은 물론 심상이고, 사진은 그 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사진가는 자기 내면에 떠오른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내는 셈이다. 그러나 심상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대충 이해했다면, 그런 생각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에는 과거 기억을 떠올려서 심상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메커니즘이 있을 수 없다. 도리어 심상과 사진은 서로 거의 상극에 가깝다. 심상은 현실 없이 머릿속 상상만으로 그린 그림이고, 사진은 어떤 것을 눈앞의 현실 공간에 갖다놓지 않고는 그림으로 그려낼 방법이 없다. 그것은 사진적인 방식으로는 사실상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심상사진의 실체는 뭘까?
심상사진을 또 다른 말로 설명하면 '피사체에 자기 내면의 감정을 투사한 상태에서 찍는 사진'이 된다. '투사(投射)'란 '어떤 상황이나 자극에 대한 해석, 판단, 표현 따위에 심리상태나 성격이 반영되는 것(네이버 사전 참조)'을 말한다. 사진가는 관심을 끄는 어떤 피사체를 골똘히 관찰한 다음, 자기 내면의 해석과 판단을 거쳐 (어떤 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한다. 그러면 사진은 곧 자기 내면적 풍경과 등가(等價)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한데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아닐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진가가 낭만적 감상에 젖어서 바다(사진의 피사체)를 골똘히 바라 본다고 해서 사진이 그런 느낌으로 찍히지는 않을 것 같다.
눈에 콩깍지를 쓴 사람에게 애인의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가 (자기 마음을 가득 담아서) 셔터를 누른다고 해서 사진이 그렇게 찍히는 건 아닐 것이다. 사진이 촬영되는 원리와 과정은 과학적이며 상당히 객관적이다. 언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거기에 신비로운 마법같은 게 작용할 여지는 전혀 없다. 피사체를 선택하고, 앵글과 프레임을 결정하고, 초점을 맞추고, 조리개를 조절하고 셔터속도를 설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진결과물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진가의 감정을 이입하는 과정'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카메라는 사진가가 피사체에 이입한 개인적인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아닐 것이다. 사실을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신비주의적 의도나, 빈약한 내용을 감추려고 난해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연막을 치는, 그런 고약하고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좀 더 솔직하게 말을 해보면, 그러니까 사진가가 카메라를 사용해서 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내는 방법이 '정말 무엇인지'를 두고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해 본다면, 아마 이 정도의 얘기를 할 수는 있겠다.
심상사진을 제작하는 두 가지 방법.
사진가가 심상, 즉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어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첫 번째는 연출이다.
사진가는 사진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찍히는 게 아니라 '본 것'이 찍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심상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일단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현실의 공간에 갖다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재를 구해 형태를 제작하고, 색칠을 하고 조명을 비춰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장면을 현실의 공간에 최대한 재현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러니까 자기 내면적 풍경을 중시하는 사진가들은 머릿속에 상상한 걸 현실에서 제작/연출하거나 자기가 창안한 어떤 행위(performance, 行爲)를 실행해서 그런 표현의 욕구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든) 스스로 사진의 조형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진가들이 일정한 메시지가 담긴 장면을 제작하고 연출해서 사진을 찍거나,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처럼, 자기가 사진의 구성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심상'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사진인지 혹은 미술의 한 분야일 뿐인지, 그리고 굳이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실행할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사진과 미술 간의 '이종교배' 같은 그 형식이 모종의 계산 하에서 진행되지는 않았는지 혹은 사진가들이 (예술적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빈곤한 처지에 몰린 나머지 생각해 낸 궁여지책 같은 것은 아닌지 의심해 왔다. 한편 그런 방식이 사진으로서 유효한 지도 의문이다. 만일 (고작?) 사진을 얻기 위한 목적 뿐이었다면, 피사체를 만드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기 위해서, 사진가는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이 현실에서 재현하기 쉬운 것이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들, '사진은 아무 것도 아니고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들 주장하기에 해 본 생각이다.
두 번째는 사진가가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과 비슷한 장면(피사체)을 현실에서 찾아내는 방법이다.
만일 머릿속 그림과 같은 장면을 현실세계에서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는 심상을 간단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된다. 카메라로 그 장면을 촬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림을 언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세상에 있기나 할까? 아마 이 경우에도 사진가는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이 되도록이면 그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장소에 있고, 현실세계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것이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상과 꼭 같은) 피사체를 찾아다니느라고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실천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소한 현실적 장애물들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통에 소위 '용두사미 격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가 토끼를 손에 쥐고 돌아오는 식으로, 당초의 의도가 흐려지고, 엉뚱한 사진을 찍어서 돌아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머릿속 그림을 찾아내기 위해서 현실세계에 뛰어든 사진가는 머릿속 그림만이 ‘최선’이라는 당초의 신념을 계속해서 고수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세상은 다양하고 아름다우며, 깊이 파고 들면 들수록, 새롭고 신비로운 것들이 자꾸 나타나는 멋진 곳이다. 신념을 지키기엔, 유혹이 횡행하고 타협의 여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일출사진을 원하는 사진가는 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빈 카메라로 돌아갈 게 아니라, 노을사진이라도 찍는 편이 더 낫다는 식의 결정을 하기 쉽다. 어쩌면 일출보다 노을이 더 낫다는 걸 깨닫고 생각을 바꾸게 될 지도 모른다. 노을보다 더 나은 어떤 게 눈에 보인다면 그것도 한 장 찍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외부 상황들을 상대하면서, 그런 식으로 (융통성 있게) 활동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 그림은 이제 그만 지워버리라‘는 유혹에 직면할 것이고, 결국은 (설득당해서) 이것저것 시각을 현혹하는 것들을 향해서 두서없이 셔터를 누르게 될 것이다. 그건 물론 당초에는 의도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핵심은 사진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면서, 찾아내는' 방식이라는 데 있다. '만들면 안 된다'기 보다 매체의 성격상, 찾아내는 방식이 더 자연스럽고, 내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다. 아무튼 거기서 중요한 건 시간과 기회이고, 사진가는 한 번 지나간 순간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에서 사진가의 의도는 점차로 약화되는 반면 우연성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사진가는 자기가 (심상을 포착하겠다는) 의도를 품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도리어 사진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심상사진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
사진가가 자기 마음 속 그림을 대신했다고 믿는 심상사진은 자기가 과거에 실제로 경험한 기억의 한 장면일 지도 모른다. 또는 그가 전에 보았던 다른 사람의 사진이거나, 잡지나 지하철에서 보았던 광고나 혹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림조각들은 그의 머릿속에 무수히 저장되어 있을 것이고, 카메라를 들고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쉽게 떠오른다. 그는 우연히 눈앞에 나타난 그런 장면에 어떤 종류의 친밀감이나 애착을 느끼고, 그것이 곧 자기 '마음 속 그림'이라고 쉽게 믿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심상사진은 대부분 그런 우연성에 기대어 찍은 사진을 '후 보정'이라는 미술적 수단을 가미해서 분위기 있게 각색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은 (마음속에서 떠오른 영상처럼 보이게) 사진에 비현실적인 색을 입히고 거기 적당한 해석을 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감정이입'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 보다, 오히려 책상 앞에 앉아서 사진을 편집하거나, 전시를 위해 주제를 구상할 때 더 많이 이루어진다. 물론 전문사진가들은 적극적으로, 상상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메시지가 담긴 장면을 현실의 공간에 재현해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런 방식을 부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고, 나는 단지 '왜 그러는 지'가 궁금할 뿐이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창의적인 메시지를 표현하고 싶다면, 사진이란 매체는 별로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를 향하고 있는 렌즈를 가지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게 만드는 방법은 뭘까? 일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하려는 걸까?
심상이란 '과거의 기억을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서 재생한 상(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사실(실제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기억은 떠올리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고, 감상에 치우치거나 편견으로 조작될 수 있으며, (누군가의 예술적 의도 등으로 인해) 과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뉴스보다는 예술작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도 있고, 내가 유독 예술작품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진이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그 안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들 (사실이 아니기에)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져보려 애를 써도 그렇게 되질 않았다. 왠지 사진을 통해서는 그런 것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가 과거를 반영하는 일없이 오로지 ‘현재’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이순간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이 사진으로 찍힌다는 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