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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Jun 27. 2024

지인의 사진집을 보며

부겐빌레아의 메시지

부겐빌레아...   

  

인터넷을 검색해서 꽃 이름을 겨우 알아냈다.

나는 여기, 서울숲 곤충식물원에서 이 꽃을 ‘처음 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단번에 매혹되어, 일부러 사진을 찍으려고 이 공원을 자주 들락거렸다.

하지만 내가 이 꽃을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는 전혀 몰랐다.

한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기억 못했지만) 이 꽃이 주는 모종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근래 어떤 여행 유투버가 그리스 산토리니의 골목을 찍은 영상을 보다가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잡지에서 사진을 한 장 보았다.

전체가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마을(산토리니 아야Oia마을)에 있는 어떤 건물사진이었다.

흰 담장 위에 주홍색 종이를 접어 만든 조화처럼 생긴 꽃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꽃이 바로 ‘부겐빌레아’였다.     

당시 나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 꽃을 보고 '천국'이 떠올랐다.

아마 하얀 담장에 늘어진 꽃을 보고, 빈소 제단 위나 상여에 장식된 조화를 연상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여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영상 속 골목에서 그 꽃h가 함께, 셀루라인 블루를 칠한 돔형의 지붕을 봤을 때 그 사진이 기억났다.

새하얀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이 해안의 가파른 절벽에 이르기까지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식물원에서 꽃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사진에 대한 기억이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이 함께 떠올랐을 것이다.     


마치 옛날 노래를 듣고 추억에 잠기는 것처럼...

사실 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옛날 노래도 잘 못 듣는 편이다.

절절하게 그리운 옛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부재의 증거라 곧바로 외로움이 된다.

외로움이 가슴까지 가득히 차면, 나는 거의 익사할 지경에 이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 때는 음악을 끄는 수밖에 없다.


부겐빌레아(서울숲 곤충식물원에서)


지인이 사진집을 냈다. 책을 받아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수록된 사진 양이 생각보다 많았고 책이 제법 두꺼워서였다. 물론 사진도 훌륭했다. 솔직히 나는 그 분이 그렇게까지 사진을 잘 찍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수고했다’는 말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잘 모르긴 하지만, 예삿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사진집 제작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한 번도 책을 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고(사진)만 넘기면 누군가 알아서 만들어 주는 건지, 아니면 사진가 스스로가 일일이 편집해야 하는지 혹은 지침을 주고 출판사에서 시안을 만들면 사진가가 검토해서 수정해 나가는 방식인지 나는 잘 모른다. 어떤 방식인지에 따라 사진가가 감당할 부담의 크기가 많이 달라질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식이든, 사진가는 제작에 개입했을 것이고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고작 몇 장의 사진을 편집하는 일도 힘들어하는 편이다. 맥락을 갖춘다거나 의미를 고려하기는커녕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은 대충 골라 대강 편집해 올리고 못마땅해 하는 나 자신을 다독이는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프린트된 사진집을 제작하는 일은 웹용 사진에 비하면 훨씬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니터에서 RGB방식으로 보던 사진이 CMYK로 종이에 인쇄되면 (색이 어떻게 보일 지 예상할 수 없어서) 시행착오를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웹용 사진은 언제라도 쉽게 바꿀 수 있지만, 한 번 인쇄된 사진을 바꾸려면 어렵기도 하고 비용도 들 테니, 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단 한 장의 사진 때문에 하루 종일 고민하는 일도 흔했을 것 같다.



나는 왼손에 두꺼운 사진집을 받쳐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책장을 집어서 넘겼다. 매 장마다 멋진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나는 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았다. 어떤 사진들은 아름답고 다른 사진은 멋지고 세련되다. 물론 미흡해 보이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간혹 어떻게 찍었는지, 촬영방법이 궁금해지는 사진이 나타나면, 페이지 넘기던 손을 멈추고 잠깐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차 여러 장씩 집어서 페이지를 듬성듬성 넘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앞표지로 돌아가서 책의 주제가 되는 제목을 한 번 더 읽었다. 다시 첫 장을 펴서, 사진가가 책을 내면서 느낀 감회가 적힌 머리말을 읽었다. 두꺼운 사진집인데도 불구하고, 다 읽는데 단 몇 분밖에 안 걸렸다. 나는 만든 사람의 수고와 정성에 제대로 부응하지 않는 내 관람태도를 의식하고는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분은 나의 지인이고, 나는 그 성과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있는 이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사실 나는 서점에서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집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사진의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사진가나 알려진 현역사진가들의 사진집도 5분 이상 들여다 본 적은 없다. 하긴 원래 아는 게 별로 없으면 볼 것도 많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내가 적잖이 놀랐다는 건 과장이 전혀 없는 사실이다. 몇 해 전부터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잘 찍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사진집을 만들 생각까지 하게 된 게 뜻밖이라, 무척 놀라웠고 또 ‘대단하다’싶었다. 흔히 아마추어사진가들이 기념 삼아 내는 얇은 사진집이 아닌 상당히 두꺼운 ‘정식 사진집’이어서 더 놀랐다. 그렇게 두꺼운 사진집을 낸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나중에 시간을 두고 다시 한 장 한 장 살펴 볼 생각이다.


[ 아마추어 사진에서 흔히 발견되는 공통점으로 너무 소재에 의존하는 점을 들 수 있다. 피사체와 사진의 외형적 등가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대상물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대상의 표면에 사로잡혀 그것만 찍으려 하면 표면적인 아름다움 이상은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떤 대상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사진가라면 찍으려는 대상물에서 자신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찍은 사진에는 나의 감성과 자아가 반영되어 있다. 바다를 찍으려 한다면 그 바다는 나에게 특별한 것이고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 순간 촬영자와 대상물 간에 긴장과 교감이 발생하고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


‘나만의 바다’는 내 머릿속에 존재할 뿐, 사진에는 찍히지 않을 것이다. ‘해석의 여지’도 좀처럼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여기에 근본적으로 매우 ‘난해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나만의 문제이고 나의 한계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랬다. 깊이 있는 관찰과 독창적인 발견은 사진의 핵심이다. 그래야만 같은 것도 남과 달리 볼 수 있고 차별화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건 대상물의 또 다른 표피일 뿐, 사진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의미는 사진에 배어들지 않고 머리 위를 빙빙 맴돌 뿐이었다. 내가 감성적이 될지언정, 카메라는 감정에 치우치는 법이 없었다. 카메라는 항상 그 객관적인 눈으로 대상의 표면 만을 사진으로 찍어냈다. '나만의 감성과 자아'를 통한 경험이나, 내가 기껏 생각해낸 의미같은 건, 그대로 '나만의 것'에 그쳤다. '피사체와 나 사이의 긴장과 교감' 역시 타인에게까지 건너가서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사진가들은 흔히 사진을 통해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했으며, 그 사진에 자기 ‘감성과 자아’가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 분들의 착각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진에서 그런 것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에서 ‘피사체’를 보았을 뿐이다. 내가 유난히도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우 일 수도 있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건성으로 보았을 뿐, 공감하려는 노력이 모자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미술작품을 대하면서 감정의 변화를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가슴이 찔리는 듯한, 격렬한 감동에 휩싸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사진을 좋아하지만, 사진가가 의도한 메시지에 설득당하거나, 이미지에 공감해서 감정의 변화를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종종 사진에 담긴 피사체와 상황에 놀라고 연민을 느끼지만, 사진가가 만들어낸 기교적인 결과물을 보고 거기에 감동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름다운 사진을 보면, 짜릿한 감각적 전율을 맛본다기 보다, ‘미적지근한 호감’을 갖는 정도에 그쳤다.

어쨌거나, 사진이 오로지 매우 풍부한 감성을 지닌 일부 관람자에게만 어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일기가 글(문학작품)이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개인의 사적(私敵)인 활동이 예술작품이 되어 세상에 퍼져나가려면 어떤 힘이 가해져야 할까? 그저 뛰어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 같다.

남들도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함께 공명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의 관심사’가 되고 봐야 한다.


[ 사진을 찍으면서 나의 자의식과 외부사이에 존재하던 벽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나는 비로소 나의 언어를 찾고 타인과 소통할 수단을 얻게 된 것이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


내 일처럼 여겨져야, 남들도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고, 감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작품’의 핵심은 ‘소통’인 셈이다. 한데 사진은 유난히도 이 부분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만의 철학과 정서가 담긴 사진은 ‘그의 사진’일 뿐, (웬만해서는) ‘사진작품’이 되어 세상에서 공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벽’이 아직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 같다. 사진은 단지 ‘그의 사진’일 뿐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순수하게 ‘사진을 보는 사람(관람자)’의 입장은 대체로 이런 식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사진들을 보여줘 보라. 그는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꺼내고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여기 좀 보세요, 이게 내 형이고, 이게 어릴 적 나예요” (롤랑바르트. 밝은방)]


그러니까 모든 사진은 ‘남의 사진’일 뿐이다. ‘남의 일’인 것이다. 내가 사진동호회 갤러리에 올라온 남들 사진을 건성으로 보듯이, 남들도 내가 올린 사진을 같은 방식으로 볼 것이다. 만약 내가 사진집을 낸다면, 그 사진을 보는 내 지인들의 태도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는 좀처럼 남들과 공감하거나 공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사진가가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이 아마도 '사진가 탓'은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 사진이란 매체는 근본적으로 소통이 잘 안 되는 형식이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건 ‘사진이 좀처럼 그 지시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늘 ‘무엇인가의 사진’일 뿐, ‘사진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사진의 기록적 속성이 다른 해석을 거의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진가의 창작의도가 좀처럼 먹히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사진으로 찍어 놓고는, 거기에 다른 (독창적인) 해석을 요구해봤자 ‘전부 무효’라는 말이다.


<롤랑바르트>는 책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언급한다.


' 그는 어떤 사진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감동한 이유는 사진속 인물의 목 아래에 늘어뜨린 목걸이 때문이었다.

그건 죽은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이 항상 걸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목걸이(꼬아서 만든 가느다란 금줄)였다.

그에게 고모가 되는 그녀는 시골에서 평생을 노처녀로 살았다.

그는 평소에 그녀의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하며 늘 어떤 아픔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


내 경우에도, 사진이 감동을 주는 방식은 주로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사진속 피사체가 내 정서를 건드리는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에나 '감동'이 작동했다. 사진속 인물이 (내가 애틋하게 여기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았다거나, 오래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 거기에 찍혀있다든지. 물론 그런 부분은 대게 사진가의 예술적 의도나 기술과 상관없는 것이고,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오히려 예술적 의도가 잘 작동해서, 사진이 실제에서 멀어지고 예술작품의 성질이 짙어지면 감동의 여지는 줄어들 것이다. 사진가가 형식미에 치중하면 할수록, 대상물이 가진 본연의 특성은 약화되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형상이 다른 사람의 경험에 닿아 정서적으로 영향을 줄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식미에 치중하는) 사진예술가들이나 아마추어사진가들의 작품에서는 감동을 느끼기가 더 힘든 것 같다. 놀랍고 뛰어난 사진은 있지만, 나를 찌르는 감동적인 사진은 보기 드문 것이다. 감동은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나 가능하다.

사진에 담긴 장면이 충격적, 감동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건 물론 ‘예술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사진가의 문제’라기보다는 ‘피사체와 관람자 사이의 문제’일 뿐이다. 사진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연’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사건일 수도 있다. 물론 사진가의 예술적 의도를 통해서 성취한 결과도 아니다.



나는 왠지 지인이 낸 책(문학작품)은 읽기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런 일(아는 사람이 책을 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글을 통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의 내면을 보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내가 글을 읽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인식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글은 확실히 그 사람과 꼭 붙어있다. 만약 지인이 그린 그림이 갤러리에 걸린다면 나는 우선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할 것 같다. '그림 그리기'는 기초적인 기능을 습득하는 과정 조차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 자체로서’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그림이어서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그린 그림이어서도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사물이자 감각적 실체로서의 그림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림은 혼자서도 충분히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애착의 대상도 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고, (글이나 그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의 솜씨와 열정에 놀랐거나 아니면 사진속 피사체에 감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나 사진(형식)에 정서적으로 공감했다거나 애착을 느껴서는 아니다. 사진을 통해서는 그 사람을 느끼기 힘들고, 내가 사진을 ‘사진 그 자체로서’ 좋아하게 되는 일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웬만해선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나는 주로 피사체를 보게 될 뿐, 사진가 자신이나 형식 안에 담긴 메시지 같은 것은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항상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대상(피사체)과 꼭 붙어있다. 그래서 관람자는 좀처럼 사진가의 내면에 접근할 수 없고, 사진에서 피사체의 ‘외형적 등가’ 이상의 무엇을 봐 내기도 힘들다. 나는 (사진에 담긴 사건이나 사물이 아닌) ‘조형’을 통해서 그안의 메시지를 읽는 데 성공했던 적은 없었다. 사진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며 사진을 통한 소통은 오로지 사진이 가리키는 지시대상인 피사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사진이 ‘어떠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진가는 많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주장에 공감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내 사진에는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험이 담겼을 뿐이다. 그 사진이 남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되는 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때로 나는,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것을 사진을 통해서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고, 남들도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 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 사진을 찍었지만, 가족사진이나 기념사진처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사진 이외의 사진에서는 어떤 의미도 느낄 수 없었다. 풍경사진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보면, 그 사진을 왜 찍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상당히 긴 시간을 바쳤던 사진 활동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의미가 ‘사진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마도 의미는 ‘나’에게 있고, ‘카메라와 함께 내가 보낸 시간 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가 아니라 사진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비록 전문가가 되거나 직업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소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사진으로 인해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되고, 다시 보게 되고, 자세히 보게 되고,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이 (사진이 아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수많은 경험을 하게 만들었고, 특별한 시각을 갖게 해주었으며, 특별한 관념의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다는 얘기다. 특히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떤 독특한 현상들은 나에게 제법 많은 글을 쓰게 만들었고,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많은 즐거움을 누렸고, 세상과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으며, (남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인간적으로 약간 더 성숙해진 것도 같다. 나는 사진의 성과가 ‘사진’이 아니라 ‘사진가 자신’인 것 같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사진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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