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된 내 첫번째 아가
제왕절개는 후불제라고 했던가.
그동안 첫째를 육아하면서 역시나 이 고통을 잊고 있었다.
하반신 마취를 했기에 다음 날까지 물 포함 금식에 머리를 들 수 없이 똑바로 누워만 있어야 했다.
마취가 풀려오면서 생살을 찢어낸 자리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통에 페인부스터까지 내 몸에 주렁주렁 달려있지만 이것들로 내 통증을 완화할 수 없었다.
항생제 주사를 맞으며 진통제 주사도 함께 덤으로 맞아야 했다.
그러면 몇 시간동안은 그래도 참을만 했다.
더 기가막힌건 다음 날이었다.
소변줄을 빼고, 화장실을 가야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일단 그렇게 하려면 내 몸을 일으켜 두 다리를 움직이고 화장실로 한걸음 한걸음 내 의지로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마자
내 배는 생살을 찢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 순간 너무 아파 눈물이 나 엉엉 울었다.
앉았으니 이제 일어나야 했다.
미션을 수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앉아있다가 이제 일어나려니 일어서는건 되었다.
조금만 참고 화장실만 가면 되었다.
신랑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겨우 한걸음 한걸음 옮겨 미션 수행.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 시간이 지나가겠지만 이 고통을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이 링거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아기를 면회하러 가는 엄마들은 참 대단해보였다.
나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렵고 아팠기에 1층 신생아실 면회를 가는건 진작에 포기했다.
진통제에 의존하며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저녁쯤 되니 조금은 익숙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은 링거도 빼고, 더 많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면회도 가고, 수유도 했다.
하루 사이에 장족의 발전이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3일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신랑은 둘째 면회를 내려가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내 첫 아가도 보았을지,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사진이 공유되는 순간에 늘 우리 아이는 무언가 다른 할일들을 하고 있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친정엄마는 아이가 시큰둥한거 같다고 했다.
아이와 영상통화를 했다.
"시우 잘 놀고 있었어?"
"엄마! 이것봐요! 나 오로라 블레이드도 접고, 반짝이는 걸로도 접었어요 봐요!"
최근 푹 빠진 팽이 종이접기를 보여주며
혼자서 접은 작품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자랑을 다 듣고 나서 조심스레 물었다.
"시우야, 혹시 아기 사진 봤어? 못봤으면 다시 볼래?"
"어디? 어디? 동생이야? 엄마! 동생 예뻐요!"
아이가 동생이 예쁘다고 말하는 한마디에 또 다시 눈물샘이 터질뻔 했다.
아이가 엄마 기분 좋으라고 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 동생이 예뻐보여서 그렇게 말하는 건 분명했다.
아이랑 얼른 만나고 싶었다.
기침이 너무 심해져 폐렴으로 갈 수도 있다는 병원의사의 말에
덜컥 겁이나 친정엄마도 아이 병간호 하느라 고생중이셨다.
아이는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 집에서 안자고 우리집에서 할머니랑 자겠다고 했는데
몸도 아프고 힘들어서 그랬는지,
엄마가 없는 집이 싫었는지,
그동안 할머니집에서 자기 싫어했던 아이가
할머니집에서 지내기를 선택했다.
아이는 내가 병원에 입원해있는 내내 열이 떨어지질 않았다.
너무 걱정이 되었다.
일주일 이상 열이 지속되고 기침은 계속 심하니 언제쯤 호전되는 것인지....
내가 없는 동안에 더 크게 아프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너무 걱정 되었다.
다행히도 점차 호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열의 횟수도 줄어들고 기침도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나의 첫번째 아가.
엄마랑 이렇게 오랜시간 떨어져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우리가 서로 성숙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엄마도 너무 보고싶단다.
조리원 생활하며 엄마 몸도 잘 추스르고 곧 만나자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