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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Apr 06. 2024

인연(因緣)

연기(緣起)는 과학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연관 짓고 싶을 때, 우리는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라는 표현을 쓴다.

근데. “우연은 신이 익명을 지키고자 할 때 쓰는 표현이다”라는 아인쉬타인의 말처럼, , 사실은 지구상에,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우연이란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우연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다.

다만 몰랐을 뿐…


인연(因緣)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고, 다르게 줄여서 연기(緣起)라고도 한다. 즉, 직접적 원인인 因과 간접적 또는 환경적 조건인 연(緣)에 따라 생겨난다는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인과(因果)의 법칙으로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억지로 만들 수도, 거역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는 우주의 본질이다.

시간적 관점에서도, 그 어떤 존재도 과거로부터의 이어짐이 없이 독립적일 수 없으며, 수많은 존재들의 과거로 만들어진 전체로서의 주위 환경 없이는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은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환경을 망라한 것으로, 과거로부터의 연속선상에 있듯이, 지금 이 순간의 존재가 결국은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원인 되어, 미래의 환경(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즉일체(一即一切), 일체일즉(一切一即) 이라고나 할까?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이어져가고, 나라는 존재들의 상호 작용으로 우리, 전체라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분리할 수 있는 독립적 존재라기보다는 유기적 전체라고 할 수밖에… ,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다, 사람-동물-식물-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이 서로 어우러져 상호의존 하는 과정의 연속이요 사건의 흐름으로 이루어져가고 있으니, 어느 것도 2분법으로 나누어진 독립적 존재로 설명될  수가 없다.  

연기요, 불이(不二)다.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 부르는 전체의 부분이며, 시간과 공간적으로 봐도 한정된 일부일 따름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것과 분별되는 것이라고, 일종의 시각적 망상을 통해 경험한다. 이런 망상은 우리에게 일종의 감옥으로, 우리를 개인적인 욕망과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제한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와 자연 전체를 하나 된 아름다움으로 포용할 수 있도록 연민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이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야 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79 ~1955) -


결국, 과학의 기초 함수라 할 수 있는 <y=f(x)>와 닮았다.
 f라는 함수로 이루어진 조건 또는 환경에 x라는 원인행위를 한 결과가 y로 표현되니 말이다.

 연기를 인드라 망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점)들이 서로 이어져, 선(1차원), 면(2차원), 입체(3차원), 시공간(4차원)은 물론, n차원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니,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 또한 “get connected”, ‘초연결’이다.  


결국, 모든 결과에는 그리 된 원인이 있었다는 게 맞는 듯하다. 다만 몰랐을 뿐!


인간이라는 우리 인식의 한계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따름이지  우연이란 없다. 차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면이라는 2차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차원을 달리하여, 3차원 입체 공간을 두고 보면, 그 면의 위, 또는 아래에 있을 수도 있고, 왼쪽 또는 오른쪽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연기적, 상대성은 외부의 존재들 간에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어떤 이는 “착하다, 어질다”라고 평하는 데, 또 다른 이들은 “모질다, 나쁘다”라고 말한다. 보는 이가 다르고,  본 시간이 다르고, 본 환경이 달랐고, 그때 그와 나의 관계가 달랐기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내 마음 또한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내면 의식 세계는 무단히 변하고 복잡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한다, 내부, 외부적 원인과 상호 마주친 관계에 따라…


의식의 세계가 이러할 진데,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행위들 이면에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것들이 더더욱 많을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그 상대방의 마음과 환경은 오죽하겠는가? 이렇게 시간적, 공간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그물망이다 보니,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 남의 탓으로만 돌리거나, 차라리 우연으로 덮어 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고 했다. 냉정히 놓고 보면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면, 결국은 내 탓이로 소이다!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12 연기가 등장한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무명과 무지로 비롯된 행위들로,

현재, 나와 남을 구분하고, 5감(感)과 나라는 생각을 통해 그려진 허상에 현혹되어 물질과 쾌락에 대한 감각적 욕망과 어리석음, 그리고 이로 인해 빚어진 분노에 휘둘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인한 집착()이 탐진치를 빚어내니, 이런 허상에 대한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미래에라도, 이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지금 올바른 수행(, 八正道)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일컫는 사성제(四聖諦)이고, 그 시작이 바로 보는 것(正見), 즉 알아차림(사띠, 마음챙김, mindfulness)이다.


▶ 무명(無明): 공(空) → 연기(緣起)→ 괴로움(苦)

모든 문제의 시작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無知), 보지 못함(無明)으로 인하여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무의식적, 본능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이런 어리석음으로 인해(12 연기)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자아란 허상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잠재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진짜 지배세력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잠재의식인 데도 인간은 의식적인 자아가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고,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사고가 만들어낸 과정이다”라고 설명한다.


緣起(연기, 因緣生起): y=f(x)

모든 報(결과, y)는 나의 행위(業, 因, x)로 인해 緣(환경 또는 조건, f)에 따라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것이 현재 이 순간이 중요한 이유이다. 선업선보/악업악보, y(종속변수)가 또 새로운 x’가 되어, 상호관계에 있는 다른 독립변수들과 연결 지어진 새로운 f(조건)에 따라 새로운 y’로 이어지는 윤회를 거듭하게 된 것이다.   

  念(사띠, 알아차림, mindfull)

무의식적, 습관적 반응이 불러온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단계가 알아차림이다.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잘 지켜보자는 것이다. 마음 챙김(대상을 알아차림)을 통해 멈추고 대상을 내려 두는 수행이다. 망상임을 알아차리면 망상은 곧 사라지게 된다.


   智(지혜, 명심/明心)

무명(無明)은 밝지 않아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어다. 지혜는 바로 그 무명의 반대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혜에서의 지(智)는 단순히 안다는 의미의 지(知)가 아니다. 알 지(知)+밝을 명(明)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日)와 달(月)이 밝히고 있으니, 그냥 온 천지가 훤히 보이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의 등불을  켜면, 무명과 무지로 드리워진 어둠은 사라지고(형상 지어졌던 환상은 사라지고), 청정하고 고요한 공간(본성)이 훤히 드러나 보이게 된다는 설명이다.


  禪 (선)

선(禪)은 보일 시(示)와 오직 유일하다는 의미의 홑 단(單)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오직 유일한 그것, 즉 본성인 공(空)이 보인다는(억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일체로서 전부가 보인다) 뜻으로 해석된다. 관찰자에게 모든 존재가 단순하게 (하나임이) 보이게 되는 고요한 상태(空, ᆞ非상태)에 이르러  本性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알아차림(念)을 통해 멈추고 비운 평온한 상태(平靜心)에서 지혜(智慧)의 등불을 켜고, 고요, 청정한 본래의 상태 (空)를 발견(見性)하는 내면 성찰 수행이 바로 참선(參禪)이다.



▪  12 연기(緣起)

'(緣)'이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起)'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연기는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갈애)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의 열두 가지로 이루어진 윤회의 사슬을 뜻한다.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무명), 여러 맹목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업을 짓고(행), 이 업으로 말미암아 앎이 생겨나고(식), 이 앎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의 현상이 생기고(명색), 이 현상으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 <色聲香味觸法>이 생기고(육입/육처:眼耳鼻舌身意), 이 여섯 감각에 힘입어 대상과 접촉하고(촉), 이 감각이 대상과 접촉하여 여러 느낌이 생기고(수), 이 느낌으로 말미암아 욕망과 애착이 생기며(애), 이 욕망과 애착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생기고(취), 집착함으로써 이 세상의 존재가 생겨나며(유), 이 존재로 말미암아 생명이 있게 되고(생), 살아 있기에 늙고 죽는 괴로움이 생겨난다(노사).

12 연기에 나오는 12가지는 마치 갈대가 저 혼자 설 수 없고 다른 두 개의 갈대와 서로 의존해야 설 수 있듯이, 제각기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다른 존재(또는 현상)와 서로 의존하며 생멸한다. 달리 말하면, 12지는 물론 모든 존재와 현상은 독립된 모습(自性)이 없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덧없이 변하고(無相) 실체가 없어서(無我) 공(空)하다.

욕망(갈애) 또한, 심신의 감각 작용과 느낌 등으로 인해 생긴 것(연기)에 불과하기에, 실체가 없어 덧없고 공하다. 이렇듯 무상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고통을 멸하기 위해, 호흡 관찰을 통하여 욕망을 가라앉히고,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아나바나 사띠, 호흡명상)에서부터 시작되는 바른 수행(팔정도)을 권장한 것이다.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苦集滅道)>
▪ 팔정도(八正道, 8가지 바른 수행)

①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즉 바른 견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②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이라는 뜻으로,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바른말로 정사유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실천이다. 즉 거짓말, 속이는 말, 이간질하는 말,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참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  바른 행동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부정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사유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 바른생활이다. 일상생활에서 건전하게 생활하고 바른생활 습관을 지니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⑥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으로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正念):  바른 의식으로, 항상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⑧  정정(正定): 바른 명상으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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