핌피 (PIMFY, Please In My Front Yard),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이로운 것은) 내 앞마당으로 보내라! (피해가 될 것들은) 절대 내 뒷 뜰에 용납하지 않겠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이 심화됨에 따라, 나와 나머지에 대한 분별심에서 비롯된 이기주의는 갈수록 팽배해지고, 그 표현법 또한 갈수록 과격하고 극단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온 종교 분쟁이나, 정당 간, 계파 간 정쟁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종 지역, 직업별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대다수에게 미칠 피해는 무시한 채, 결국은 폭력으로 까지 이어져 사회가 마비되는 극단 대립의 상황으로 까지 몰고 가곤 한다.
“경쟁은 외발 자전거 바퀴와 같아, 멈추면 쓰러진다!”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어지는 현대사회는 변화와 혁신을 생존전략으로 내세우다 보니, 우리의 사고나 표현도 무척이나 빠르고 과격해 간다. 중간이 없는 듯하다. 모 아니면 도다. 이러다 보니, ‘중도’ 또는 ‘중용’은 점차 자리를 감추고 곳곳에서 극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일 텐데….
진정한 창의력과 혁신은 멈추고 비워야 가능할 텐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 했고, “바쁠수록 돌아가라 했다.” 어디에 어떻게 쓸지도 모른 채, 그저 부지런히 주워 담아만 봤자, 잡동사니요, 쓰레기 하치장이 될 뿐이다.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머릿속을 쥐어짜면 짤수록, 더욱 망가진 폐기물 더미밖에 더 나오겠나?
‘중도(中道)’는 불교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깨달음을 얻음) 후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승려들에게 주신 첫 법문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중심 사상이 ‘중도’이다. 왕자로서의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쾌락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난 후, 이후 6년간의 가혹한 고행을 통해서도 얻지 못했던 깨달음을 마침내 얻은 결론은, 낙행(樂行)도 고행(苦行)도 세상과 우주의 진리를 제대로 보기 위한 올바른 수행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감각적 쾌락 또는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떠나 몸과 마음의 조화를 얻는 중도에 서는 것이 바른 수행임을 체험으로 자각하고, 이것이 본질을 왜곡 없이 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극단적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강조하다 보니,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적절한, 알맞은 또는 온건한 처세를 의미하는 유교의 ‘중용(中庸)’과 동의어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엄밀히 보면 중도(中道)와 중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용(中庸)’이란 양쪽 끝이 아닌 중간, 즉, 양 극단을 인정하고 이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 또는 중간을 의미한다. 쾌락과 고행이라는 상대적 양 극단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으로, 마음에 구속된 유심상태라 볼 수 있다.
반면, ‘중도’란 상대적 견해에 불과한 양 극단을 인정치 않고, 이로 인한 대립을 초월함을 뜻한다. 결국, 대립과 분별심이 중도의 반대말인 셈이다. 쾌락이나 고행과 같은 상대적 견해가 허상임을 알고, 어느 쪽에도 메임이나 집착없이, 이를 초월하는 것으로, 마음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
말로 표현할 길이 없고(언어도단), 마음이 향하는 자리도 사라져 버렸다(심행처멸)는 표현이 중도에 대한 설명이다.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물론, 마음(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그냥 중도라 했으니, 언어나 개념으로 설명이 되질 않는다.
중도는 개념적 이해나,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철학적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원을 달리 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단면이 아닌 총체적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의 단면(2차원)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입체라는 3차원 공간을 두고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위도 있고, 아래도 있고, 옆이라는 공간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시간까지 더한 4차원의 시공간(時空間)을 놓고 보면 더욱 …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을 벗어나 시간이란 개념을 두고 보면 3차원 공간에서는 형상을 특정할 수 없어 무아(無我)라 했으나, 시간을 두고 보면 무상(無常)이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하고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의 세계인 실상(實相)은 우리 인간의 인식영역에서는 제대로 보거나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이니, 우리로서는 지금, 여기에 나타났다, 변하고, 사라지는 매 순간의 현상(現象,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사물의 모양과 형태)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나’라는 개념에서부터 생겨난 허상, 그로 인한 분별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중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다.어쩌면, 주관적 허상이라 할 수 있는 현상뿐만 아니라, 절대적 객관적 본질인 실상 또한 다른 한 변일 수 있으니, 차원이 다른 실상계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것 또한 중도는 아닐 듯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일어키라)이라고나 할까?
고집멸도(苦集滅道)
본질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해, 양 변에 대한 집착(集)이 생겨나고, 이로 인한 갈등이 불러온 고통(苦)을 멸(滅) 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시비 또는 선악의 상대적 허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데 이를 위한 실천방법이자 실천행위로써 제시된 것이 중도(道)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실상에 따른 소신 있는 실천이라 할 수 있으니, 소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나, 정작 소신을 가지게 되면 또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으니 참 힘든 길이다.
‘있다’ , ‘없다’가 아니다. 관계 속에서 실상을 봐야 함이다. 즉 어떤 때는 있는데. 어떤 때는 없는 지를 보아야 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해. 연기(緣起)로 무상(無常) 하니, 이를 표현할 도리가 없다. 설사 표현하더라도,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나타난 형상일 뿐,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변하기에 무상하다. 결국 알아차림을 통한 실천적 행동이 필요하니, 중도라 할 수밖에… 그래서 중도란 그때그때 나타난 실제 모습(실상)을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실천방법이자 행위인 것이다.
어떤 문제 상황을 접했을 때, (찬성 또는 반대를 표현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원만한 인생을 위하여 참고 머무름을 의미하는 것이 중용이라면,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성공이나 원만한 인생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나서서 직언할 수 있는 것이 중도라 할 수 있다.
중도란 온건파, 무소신이 아니라 편견이 없기에 메임이 없어 자유로와 보일 뿐. 오히려 소신 있는 행동방식이라 할 것이다. 시공을 포함한 총체적인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형상을 특정할 수 없어 흑 또는 백으로 나누지 못함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
중도실상(中道實相)
중도란 중간이 아니라, 실제의 모습(實相)을 의미한다. 중도의 실제모습이라 번역할 수도 있겠 으나, 더 정확히는 중도는 실제의 모습(형태), 즉,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우주와 대자연의) 진실된 (실제) 모습이다.”라고 번역해 본다.
실제 세상의 이치나 자연의 법리란 이렇듯 모양이나 형상을 특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상들을 초월한, 메임이 없는 마음, 즉 무심의 경지를 이름이니, 실상이란 굳이 이름 짓자면, ‘완벽’, ‘완전’을 의미한다거나 할까.
중도를 설명하기에 앞서, 양 극단에 대한 편견을 불러온 장애가 무엇인지를 논하고 이런 장애를 벗어나 중도, 묘유(妙有)를 제대로 보기 위해 팔정도(8正道), 8가지나 되는 바른 수행을 강조했던 이유다.
이렇듯, 중도란 적당히, 무난히, 튀지 않도록을 의미할 때의 중용과는 다르다. 내 마음이 만든 세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세상을 보기 위해 다섯 가지 장애(탐욕, 성냄, 의심, 게으름과 무기력함, 불안감)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念) 바르게 행동하는(正行) 수행의 과정을 강조했음이니, 중도란 튀지 않는 적당히 중간적 입장을 의미함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해탈이요, 자유일 수도 있다. 다만, 허상이 아닌 실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멈추고 비워서 어느 것에도 메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는 목석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느끼고), 아름답게 대하려는 것이 중도의 자세이다. 문제는 이를 표현하는 순간, 내 마음이 그려낸 편견으로 나타나는 우를 범하게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니, 표현이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중도는 묘유(妙有)에서처럼 무엇으로도 표현할 도리가 없어 그냥 빌어온 이름이라고나 할까? ‘우연’이란 말처럼.
말로 표현된 양 극단, 즉 있다(有)와 없다(無)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 자리, 즉 그 양변을 초월한 자리가 實相이다.
편견 없이 눈을 뜨고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자. 그 어디에 그 무엇이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가?
언어로 되어 있지 않은 대자연을 인위적인 부호로 소통하다 보니, 시선에 따라 한정된 부호를 선택하게 되면서 생겨난 편견, 오해, 불통… 이런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멈추고,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그저 바라보는 수행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이 본연의 자세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리 보면 ‘자연회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