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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Mar 21. 2024

진공묘유(眞空妙有)

인연으로 빚어 지나니...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정한 공(空)이란 묘하게 존재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만으로는 모자라, 다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에둘러 첨언한 이유라고나 할까?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空)하다 하니, 텅 빈 것이고, 

우리 인식의 한계로, 유식론(唯識論)에선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고, 

화엄경이나 법구경에선 ‘이 세상은 내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라고 하니,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諸法無我)이라고 한쪽만 생각할 수 있다. 색즉시공만 이해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세상의 이치란, ‘있다’ 또는 ‘없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형 객관식이 아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약 60조에 달하는 세포가 있고, 각 세포는 다시 수십억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리 보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없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원자론에서 보면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텅 빈 공간을 두고 보면 99.9999%가 텅 비었으니, 우리 몸의 입자를 다 털어내어도 먼지 한 톨에 못 미치니, 있다기보다는 없다에 가깝다고 정리해 본 것 아닐까?

     

이 또한 색(물질)의 입장에서 풀어 본 것일 뿐 형체를 이룬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니 형체가 있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그런데 물질의 측면에서 보면 텅 비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중력 또는 에너지라는 존재의 밀고 당기는 힘으로 인해 공간을 차지하고 형체도 이루어, 보이게 되고, 만져지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인간들 간에 공유하는 ‘공업(共業)’, 공통의 주파수에서는 같은 모습, 같은 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겠으나, 다른 동물 또는 존재도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과 같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최소한, 보는 것과 듣는 대역만 하더라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검증된  결론이니 말이다.     


물질이 아닌 비물질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인데, 라디오나 TV의 특정 채널에 맞추면 소리도 들리고, 영상도 보이지만, 다른 채널에 맞추고 있는 이들에겐 다른 소리와 영상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TV나 라디오를 켜고 있지 않은 더 많은 이들에겐 아무 소리도 그림도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다. 이런 경우, 소리 또는 그림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러니, 존재의 본질을 ‘없다’, ‘허무하다’는 부정적 의미의 ‘공’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없는 것은 아니면서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으니, ‘색즉시공‘ ’ 공즉시색‘이라 설한 것이고, 다시 ’ 진공묘유‘,  '진정한 공이란 묘하게 있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근데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일까? 어떻다는 건가?     


'인연'을 놓고 설명해야 그나마 이해가 된다. '제법무아',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 아무것도 없거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제행무상, 모든 것은 항상 변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다. 즉, 끊임없이 변하기에 (고정된 모습이) 있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공(空)이란 각각 별도로 독립된 불변의 실체가 없고(無常), 다양한 인연(因緣)의 상호 의존성, 즉 연기(緣起)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 즉 비었기에 가능하게 되는 현상을 이름이다.     


여기서, 과학이 등장하게 된다. 인연이란 바로 과학이다. 앞장에서 <y=f(x)>라고 설명한 바 있다. 현실의 세상에선 끊임없는 인과 연의 상호작용에 따른 변수로 인해, 끊임없이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메타버스 게임 환경에서 보여지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종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가 어디서 난 걸까? 종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럼, 종을 친 막대기가 소리를 만든 건가? 아니면, 종을 치게 한 누군가의 생각이, 마음이 소리를 낸 걸까?     

어쨌든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고, 듣지 못한 사람도 있고,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게 일깨워준 맑고 영롱한 소리로 받은 이도 있고, 달콤한 단잠을 깨운 짜증 나는 노이즈로 여긴 이도 있고,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이도 있다.     


이것이 상대성이요, 인연이다. 그 어는 것도 하나의 요인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없고, 똑같은 결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는 일어났다. 무엇인가를 했으니, 무엇인가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답할 수도 없으니 '묘유 (묘하게 있다)‘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기가 막힌 표현이다. 이래서 공즉시색이라는 긍정적 창조적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도(中道),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다. 애매해 보이기도 하지만, 흑백논리로 가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법리요, 불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대표적 진리 중 하나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금강경 중에서)이라 했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머무름 없이), 자기중심적 편견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고,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다름'이 있을 뿐이다. 하도 더워 물을 가득 뿌렸더니, 어느 순간 증발되어, 뭉게구름으로, 짙은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여기서는 비로 내려오는데, 저기서는 눈이 되어 내리고, 내린 눈, 비가, 다시 물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가기도 하고, 계곡의 폭포에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이 되기도 하니, 이것이 무엇인지를 이름 지울 수가 없을 따름이다, 인연 따라 다르게 나타났을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어떤 형상으로 나타났던, 그런 결과에는 원인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거들랑 매 순간, 기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그래야, '선업', 좋은 씨(인)를 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선한 씨를 뿌리다 보면, 좋은 열매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내가 먹게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이웃이던, 내 자식이던, 그 누가 되었던...


그게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이것이 '인연', '연기'이다.
이런 인연 따라 나타날 수도, 아닐 수도, 나타났으나 다음 순간 마주하게 될 각기 다른 연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일 수도 있으니, '묘유'인 것이다.     


정리하면, '진공묘유'란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상통하는 설명이요, '무상(無常)'이라 할 수도 있으니, 결국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 설명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상호의존하고 상관하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성이라 했다.     


깨달음 또한 알아차림과 지혜, 통찰이 밝히고 있는 한은 지속되겠지만, 인간의 몸으로 인간세상에서 살아가는 하은 영구히 지속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싶다.  이래서, 그 어떤 지도자, 스님, 목사, 신부라 할지라도 완벽한 모습으로 항상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그 장면에서의 그 분일뿐이다. 거기에 내 마음까지 합쳐서 만들어진 모습일 뿐이다.   

  

결국, 인간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고 있는 존재가 영원한 깨달음을 얻은 완전체라고 주장하는 이일수록, 사이비 교주에 가깝다고 볼 수밖에...
매 순간 알아차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 듯싶다.     


'도(道)'는 깊은 산중에만 있는 것일까?


적막한 산사의 새벽 종소리만을 고집할 수도, 들을 수도 없지 않은가? 
위대한 도인이라야만 내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둔한 자의 무지한 행동에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연기(緣起)', '묘유(妙有)'는 항상 그 자리에 있건만, 보이고, 못 봄은 오직 나에게 달렸음이요, 깨달음 또한 큰 깨달음, 작은 깨달음, 영원한 깨달음도 있고, '유레카'라 외치는 순간의 깨달음도 있다. 이것만이 진짜고, 저것은 틀렸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히려 생활 속 명상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다양한 환경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들여오는 종소리, 아니 종소리가 아닐 수도 있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자세 아닐까?
 

틀린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를 뿐. 정해진 모습이나 기준은 없다.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니, 이래서 '묘유'라 하지 않았을까? 내세우기보다는 겸허히 귀 기울여 듣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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