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무더운 여름날, 둘째 딸이 태어났다
엄마가 나 같은 아기는 10명도 키울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입덧이 없었다고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너무 잘 먹고 조용히 잠만 자니까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고.
어느 날은 애가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곤히 자고 있는 나의 코 아래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해봤다고 한다.
그리고 걸을 때가 되었는데 다리에 힘이 없이 서질 못해서
'혹시 문제가 없는지 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야겠다'라고 생각한 그 순간 갑자기, 다리에 쫙 - 힘을 주더니
부들거리며 일어섰다고. 크면서 먹는 것도 가리는 거 없이 잘 먹고 수월하게 키웠다고 했다.
순둥순둥한 나와 달리 언니는 엉뚱 발랄 사고뭉치였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내가 미웠는지, 내가 기어 다닐 때부터 나를 향한 질투와 귀여운(?)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하루는 머리를 세게 밀쳐 바닥에 쾅 박게 하고, 웃더니. 조금 커서는 나를 깨끗하게 세수시켜 준다면서 화장실로 데려가서는 오줌물로 말끔히 세안을 시켜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 얼굴이 이리도 노란 것인가..’
그런데 언니는 영특하게도 엄마 앞에서는 나를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대부분 나의 상황과 속마음을 알고 있던 적이 많아 신기하다. 엄마들은 다 그런 걸까?
4년 후, 쌍둥이 동생이 태어났을 때쯤 괴롭힘이 잠잠해졌다
꼬물손으로 둘이 각자 쌍둥이를 안고 사이좋게 나란히 우유를 먹이고 있는 사진이 있다.
아마도 언니는 예쁘게 태어난 데다 첫째라
가족과 할머니, 할아버지, 주변 사람들의 이쁨까지 모두 독차지하고 있다가 모든 걸 뺏겨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꼈을 거다.
어린 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언니를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나는 좀 커서는 조잘조잘 말을 잘했다.
초등학생 때도 글쓰기와 노래 부르기, 시 짓기를 즐겨했다.
비실비실 마르고 작아서 가시, 꼬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 마치 나만 소인국 사람같이 작은 모습이다.
선생님과 도란도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서 쉬는 시간 선생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5학년때 가장 좋아했던 젊은 여자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은 늘 내가 나중에 꼭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6학년땐 공책에 소설 같은 것을 적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은 쉬는 시간마다 다음 편을 기대하기도 했다.
나는 모든 것에 열정이 넘치며 적극적이었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일에 기쁨을 느꼈다.
선생님의 권유로 고학년 내내 합창부 메인 솔로 파트를 맡게 되어, 학교 대표로 오케스트라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둡고 컴컴한 무대 뒤, 반짝이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계시던 성악가.
그분이 대기 중이던 내게 드레스 지퍼를 올려달라고 부탁하셨다.
순간 너무나 떨려 덜덜 떨며 조심스럽게 올려드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노래할 땐 완벽하게 떨지 않았다.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대 직전 엄마는 내가 큰 무대라 긴장할까 걱정이 되어 “많이 긴장되지?”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엄마의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고 했다 “아니, 걱정하지 마 엄마. 나 잘할 수 있어 “
지금 생각하면 귀여우면서도 당찬 내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아이였었나…?
엄마는 그때 한번 나의 모습에 놀라고,
조그마한 나에게서 나오는 맑고 청아한 소리와
주변의 다른 관객들의 감탄하는 소리에
엄청난 감동과 뿌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로는,
내가 아주 어린 4살, 5살 때부터 할머니를 챙기고
어른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시면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발 정리를 가지런히 하고
물건을 엄청나게 챙겼다고 했다. 지금도 거의 병적으로 나는 내 물건을 챙기고 걱정한다. 뭔가 불안하달까?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면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어느 정도냐하면, 방금 핸드폰을 챙겨 가방에 안 보이게 넣어뒀다면, 그것이 잘 있는지
지퍼를 여러 번 열어 ‘그래 핸드폰, 잘 있지?’ 하고 계속해서 확인해 본다는 것이다. 아니 물건이 살아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걱정되는지.
이전엔 확인하는 시간도 굉장히 길었는데, 성인이 되면서 남들 눈을 의식하다 보니 이제 1초 스캔으로 빠르게 확인하고 닫는다.
누가 보면 그리 대단한 변화는 아니지만 내겐 아주 큰 노력이 들어간 변화이다. 심지어 물건도 잔뜩 챙겨서 다니는 사람이라 많을수록 더 힘들다는 사실..
조금 덜 꼼꼼하면 좋았을 정도로 나는 매우 심하게 꼼꼼하다
엄마는 이런 내가 10명이어도 키울 수 있다고 했지만,
나란 아이는 생각보다도 더 예민하고 복잡한 아이라 나는 내가 조금 어렵다.
단순하게 살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앞으로 나와 가족의 모든 일상과 마음속,
머릿속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들로 꽉 찬 나의 말들을 이곳에 쏟아내 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