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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영 Aug 24. 2023

우리의 사춘기

그땐 잘 보이지 않던 아픔들

나에게 큰 기억으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우리 여섯 식구는 함께 살았지만,

이때 가장 흩어져 있었던 것 같다.


"엄마 여기야..?"

서울에서 처음 벗어나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처럼 생긴 칙칙하고 허름한 분위기의 다세대 주택이었다. 낡고 좁은 계단을 오르면 맨 꼭대기 층.

방 3개 화장실 1개


안방은 부모님이

한방은 쌍둥이가

또 작은방은 첫째인 언니가


그리고 애매한 포지션의

둘째인 나는 거실 한켠에 커튼을 치고 생활했다.


'그래도 늘 내 방이 있었는데...'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기도 전에, 당시엔 당연하단 생각에 별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언니는 한창 사춘기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다고 졸라대다가

아빠의 반대와 고지식함에 심통이 난 건지,

제대로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언니의 예술적 성향이 드러나는

몇몇 행동들이 있었다.


실내화에 독특한 그림을 그려 신고,

핸드폰 케이스에 액세서리를 달아 꾸미고,

티셔츠나 청바지를 잘라 리폼해서 입는 등


그 당시 아빠는 그런 조금은 특별한 언니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 작은 잘못도 그냥 보아 넘기시지 못하고,

아빠의 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하면

가차 없이 혼내고, 없애버리셨다.


언니는 완벽주의자에 집중력이 엄청나고, 집요 한 편인데

하고 싶은 일은 잘할 때까지 끝까지 해내곤 하고

뭔가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냥 완전히 놔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니는 하고자 했던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그 예술적 혼을 담아..

친구들 몸에 바늘로 한 땀 한 땀 타투를 해주거나,

손으로 직접 본인의 코와 혀에 피어싱을 뚫으며 희열을 느끼는 등 소름 돋는 무서운 행동들을 시작했다.


"어때..? 이쁘지?"

피어싱 후 비스듬히 나를 내려다보며,

새빨갛게 붉어진 광인의 눈빛으로

웃으며 말하던 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언니가 한편으론 살짝 무섭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웠다.


내가 본 언니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발상이 독특하고

특별했다. 그런 모습이 난 부럽기도 했는데,


어쩐지 이상한 행동들은, 좀 더 마음껏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라 생각된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인정받지 못하는 별난 아이로 비춰지게 된 것에 대한 언니의 슬픔과 아빠의 억압에 방어 기제로 사용된 반항심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아빠는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었다.


아빤 젊을 때 음악을 하셨었고, 그래서 당신의 모습이 비쳐 너무 힘든 길이라 생각해 극구 반대를 하셨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나도 같은 꿈을 마음속에 고이 접어두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절대 기타를

놓지 않았다. 그 당시 전교에서 딱 한 사람, 아빠만

음악의 꿈을 키울 정도로 정말 흔치 않았다고 한다.


아빠는 꽤나 연습 벌레였다.

하루 24시간 온통 기타 생각에 잠겨있었고,


한창 통기타 붐이 일어나

엄마와 기타 학원에서 만나 연애를 하다가

결혼해서 둘째인 나까지 낳고, 1995년 학원을 차렸다.


아빠는 굉장히 꼼꼼하고 상냥한 스타일로

가르침에 소질이 있으셨고,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학원은 엄청나게 잘 되었다.


그리고 학원을 더 넓게 확장시키자마자,


1997년, 그만 IMF가 터져버렸고,

이후 가장 먼저 예체능 계열이 타격을 입으면서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 후 아빠는 개인 레슨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친구의 생식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조금 지나 공장도 문을 닫게 되면서


우연히 접한 청소 용품  렌탈 업체의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인수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이태원에서 피땀 흘려 일하고 새벽까지 사무실에서 작업하다 잠이 들어,

아빠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엄마는 만삭 때까지 외국계 은행에서 일을 하다

쌍둥이를 낳고는 보험 설계사, 베이비 시터 등

곳곳을 돌아다니며,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지금까지도, 모든 일을 대충 하는 법 없이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주며 일하시는 두 분이

늘 존경스럽다.


엄마 아빤 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내 일처럼 진심을 다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부모님은 열심히 생계유지를 위해 정말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의 연락에 엄마가 학교에 방문했고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애가 참 심성은 착한데.. 나쁜 친구들과 자꾸 어울려서

걱정이 되네요. 학교에도 계속 나오지 않으려 하고.."


엄마는 고민 끝에 언니가 친구들과 멀어지게 만들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멀리 이사를 가자고 했다.


1년 만에 경기도 용인으로,

서울에서 더 먼 곳으로 가게 되었다.


집은 전에 살던 곳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다시 내 방이 생겼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이곳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언니가 완전히 스케일이 다른 엄청난 친구 무리들과

딥하게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아빤 사무실이 멀어 떨어져 살게 되고,

가끔 집에 왔지만 거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고


엄마는 서울로 일하러 다니며

집에 늦게 오거나, 못 오는 일도 많아졌다.


그렇게 되니 우리 집이 비어 있을 때마다

아지트가 되어, 언니의 친구들이 몰려와

온통 난장판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을 때가 많았다.


쌍둥이 동생들은 와중에 스스로 할 일을 하며,

나름대로 지내고 있었다.


동생들은 이때 그냥 언니라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장의 내가 처한 상황에 집중했던 탓에 동생들을 전혀 보듬어주지 못했다.

이에 대해 아직도 아린듯한 미안함이 남아있다.


언니와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술과 흡연은 기본이고 심지어 엄마 차를 몰래 빼가는 등 대범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때부터 언니의 화풀이 대상이 된 나는,

영문도 알 수 없이 계속 맞았다.

눈에 띄기만 하면 맞으니, 최대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점점 언니가 두려운 존재로 다가오고, 무서웠지만

아빠가 알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엄마에게만 비밀스럽게 언니의 일탈을 알렸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이런 상황들이 너무나 당황스러워 상담도 다니며 해결 방법을 찾아다녔지만 쉽지 않았다.


가출이 일상이 되고, 나는 각종 욕설과 예측 불가 상황을

매일같이 새롭게 접했다.

지금 생각해도 역대급 방황이 아닌가 싶다.


하루는 언니가 엄마의 차 키를 몰래 빼놓으라는 미션을 줬다.


"너 엄마 몰래 꼭 차키 빼놔. 안 그럼 진짜 죽는 거야"


그 당시 나는 엄청난 압박감과 두려움을 느꼈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몰래 빼가자니, 엄마가 너무 가여웠고

안 빼가자니, 언니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결국 고민 끝에 결론에 도달한 나는

결심 후, 정말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른다며 싹싹 빌었다.


그리곤 그날도 언니에게 먼지 나게 맞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언니는 심각해졌다.


엄마는 변하지 않는 상황에 너무나 괴로워했다.

싱크대 밑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내려치며

엉엉 울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는 모두 내 탓인 것만 같다고 했다.


나는 자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내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지금 보니 생각보다 나의 상태도 심각했던 것 같다.

답답함에 스스로를 때리면서 속으로 참아내고,

옥상에 올라가 소리 지르며 울분을 토하고, 잠시였지만 나쁜 생각까지 하기도 했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어서 남몰래 방안에 꼭 숨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곤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우린 결국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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