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도 여행 #002 ~ 산리쿠 후편
츠가루이시는 지금까지 다녀왔던 다른 시골 마을과 분위기가 달랐다. 집이 있어야 할 자리엔 콘크리트 터만 남았고, 쓰러진 잔해 위에는 반짝반짝한 새 다리와 도로가 놓여있었다. '스즈메의 문' 스팟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이런 곳에 단순히 관광을 하러 오는 것이 맞는 걸까 싶은 배덕감 마저 들었다. 너무나 조용했고, 너무나 안타까웠다. 지금껏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쓰나미 피해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단순한 피해만 남아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아픔을 참고 아프지 않다고 웃음 지어야 하는 고통이 눈에 선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큰 흥행을 이뤘지만 매우 엇갈린 평을 받는다. 지진의 공포와 피난민들의 아픔을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한 나머지 PTSD를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지진 경보가 특히 섬뜩했다. 역에서 20분을 넘게 걸어 직접 본 '스즈메의 문'은 영화와 똑같았다. 영화 속과 같은 판타지는 없었지만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보금자리를 떠난 사람들의 고향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비상식적으로 비어있는 이 마을을 걷다 보니 쓸쓸한 기분이 든다. 대체로 풍경은 산과 잡초와 트럭과 콘크리트다.요즘 유행하는 노출 콘크리트 양식의 건물 같은 것이 아닌 그냥 콘크리트 집터만 덩그러니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잡동사니들과 버려진 자동차, 마구잡이로 자란 잡초가 누군가의 집이었을 콘크리트 터를 둘러싸 오싹한 풍경을 물씬 낸다. 30도가 넘는 푹푹 찌는 더위 통에 이만 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역을 둘러싼 마을은 대부분 신축 건물이었다. 재해가 일어난지 10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역에 돌아오니 나갈 때에는 보지 못했던 표지판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동일본대재해, 쓰나미 수심이 여기까지"라고 적힌 표지판에 그어진 흰 선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오른쪽의 자판기와 거의 비슷한 높이다.
더군다나 츠가루이시 역은 아까 보고 온 문이 있던 곳보다 더 고지대에 있다. 즉, 해안에 가까운 곳은 훨씬 파도가 높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짙은 색의 츠가루이시와 아카마에(赤前) 지구는 주변보다 낮은 해안선에 30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밀어닥치면서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한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여기 놓인 석상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과 그와 함께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는 듯 했다.
열차가 들어오면서 일으킨 미지근한 바람을 맞는다. 정리권을 뽑고 자리에 앉아 한 숨 돌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열차는 얼마 가지 않아 미야코시의 중심가, 미야코역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쓰나미 피해를 입은 지역이지만 외곽 지역에 비해 빠르게 생기를 되찾았다. 역 앞에는 정말 작은 소바 가게가 있었다. 테이블에 서서 먹는 전형적인 에키소바다.
배가 고팠던 나는 주문 자판기로 치쿠와 튀김과 냉소바를 주문하고 카메라를 켜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옮기는 귀찮은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조금 뒤에 다른 손님이 주인 할머니께 지금 주문을 받냐고 물어보았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께서는 곧 마감이라 안되니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2시 30분에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배고픔에 덜컥 주문해버린 것이다. 죄송한 마음에 나는 고민 끝에 "실례했습니다 멋대로 주문 해 버려서"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께선 "오니쨩 운이 좋았어.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려서 저 손님 주문을 안 받은 거니까 편하게 먹고 가"라고 받아주셨다.
주인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오니쨩(おにいちゃん, 오빠)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찾아보니 '오니쨩'은 본래 오빠라는 뜻의 단어가 맞으나, 우리나라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이모, 누나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이다.
정말 맛있었다. 눅눅한 일본식 치쿠와 튀김도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우동인지 소바인지 모를 두꺼운 메밀 면이 최고였다. 마감이 임박한데도 맛있는 음식을 해주신 사장님께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미야코역에서 출발하는 JR 야마다선(山田線)의 열차는 3시 54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따로 정해둔 목적지가 없어 가볍게 시내를 둘러보았다. 츠가루이시와 다르게 재해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미야코역엔 산리쿠 철도의 본사가 같이 있다. 본사 1층엔 중소 사철 회사답게 자사 굿즈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츠가루이시역의 역명판 열쇠고리를 구매하고 나왔다. 가격은 500엔.
시골 역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인 자동 개찰구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역무원에게 JR 패스를 보여주니 화들짝 놀라면서 일본식 발음의 영어로 JR 홈은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라고 말해준다. 땡큐를 거듭 외쳤는데도 따라올라오며 오른쪽이라며 두 세 번은 더 이야기해준다. JR 패스를 쓰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꽤 헷갈렸나 보다.
미야코에서 모리오카까지는 느긋하게 2시간 정도 걸렸다. JR 야마다선의 경치를 담고 싶었지만 배터리가 위험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후 모리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산리쿠 지역을 다녀오고 나서 조금 후회가 됐다. 일정을 더 할애해서 더 다양한 곳을 여행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 보통은 들지 않는데 여러모로 느낀 점이 많아서 그런 걸까. 산리쿠 철도의 열차 시간이 다소 촉박했기 때문에 하루 안에 마무리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좋은 경험을 했기에 아쉬움도 더 남는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