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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Aug 23. 2024

고추밭에 참개구리 폴딱

신기방기 대단한 놈

올해 처음으로 친구 둘과 함께 고추농사를 지었다. 붉은 고추를 수확하는 부푼 순간만을 상상하며 720포기가 얼마나 많은 양인지도 모른 채 봄에 일을 저질렀다. 

첫 고추밭이어서인지 긴 장마 후 폭염에도 우리 고추밭은 병충해 피해가 크지 않았고, 고추가 붉어지자 고추밭은 온통 불이 붙은 것처럼 뿔뿔거리며 손길을 기다렸다. 고추밭을 볼 때마다 내 몸이 먼저 타들어갈 지경이라 그제사 무모하게 시작한 걸 깨달았지만, 이것이 농부의 마음인가, 외면할수록 마음은 더 타들어갔다.


셋이서 고추 따는 날을 잡았다. 둘은 고추를 따내고 한 명은 따 논 고추를 작업대로 들어 나르기로 했다. 동트기 전에 따기 시작하여 뜨거워지기 전에 다 마무리할 것으로 작업 계획을 세웠는데, 하고 보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땐 얼마 달리지 않은 것 같았는데, 고춧대 사이 숨어 있는 고추가 왜 그리 많은지. 한 고랑을 끝내는데 엄청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고춧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따내며 즐거운 얘기를 나누었다.


     이게 바로 유기농 자급자족 아이가.

     맞다 맞다. 고춧가루 사 먹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 모를 거다. 낄낄낄.

     생각보다 너무 많이 달린 것 같은데......


해가 올라오더니 점점 따가워지고 엉덩이로 밀고 다니는 고랑 사이는 한증막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내게 고추는 '이렇게 따야 된다, 그라믄 안 된다'고 내내 잔소리를 하던 친구는 얼굴을 타고 내리는 땀을 감당못해 하더니, '아이고 도저히 못 하겠다' 며 작업대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결국 나만 남았다. 

"내 다 먹어버릴 꺼다. 니는 고추씨도 없다아!"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 붙잡지도 못하고 내 속으로 나를 쥐어 박았다. '내가 미쳤지, 뭐 얼마나 좋은 거 먹을라고 꼬임에 넘어가버려 가지고서는.' 

오늘 안으로 1차 따기를 마쳐 놔야 다음 일이 수월해지기 때문에 나는 참고 참으며 흐르는 땀을 눈으로, 코로, 입으로 받아냈다.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고추밭고랑은  땀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이 적막했다. 실한 고추를 따는 수확의 기쁨은 잠시고 이후엔 수확의 고통을 확실히 맛보는 중이었다. 여기서 그만둘 수도 없고. 유기농 고추 먹으려다 병원 실려가는 거 아닌가. 내년엔, 다시는 못 하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손아귀에 힘이 빠져 고춧대를 꺾듯이 구부러뜨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뭐가 펄쩍 뛰어올랐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찢고 고춧대를 놓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개구리였다. 참개구리(엉머구리)가 고랑 사이 풀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너무 신기했다. 물도 없는데, 겨우 풀 속에서 이슬만 먹고도 실하게 살고 있다니. 


뛰어 오른 개구리가 나를 잠시 빤히 쳐다보길래 나한테 웃는 줄 알았다.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나도 웃어 주며 '야,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서 사니.' 했다. 그렇게 잠시 개구리를 만나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선선하게 힘이 생겨 나왔다. 나는 개구리가 내 고추 따는 걸 폴딱거리며 구경하길 바랐는데, 쩝, 고놈은 개구리인지라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질 않았다. 


개구리 출현에 힘입어 두 고랑을 더 땄는데, 저쪽에서 난리였다. 열받아 죽는다고. 맘먹고 일을 더 하려고 해도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몇 고랑이 더 남았지만 할 수 없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줬다. 그건 핑계지만, 사실 개구리를 보고 나니 내 마음이 왠지 느슨해지던 것이 남은 고랑은 친구들과 같이 해거름에 해야겠다 싶었다. 개구리처럼 그 적막한 공간에서 폴딱 나오고 싶었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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