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주 Jun 21. 2024

'말임씨를 부탁해'

영화를 통해 들여다 보는 돌봄현장 이야기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85세 꼬장꼬장한 정말임 할머니.


어느 날 서울 사는 아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장도 보고, 오랜만에 집안 정리도 하고 마음이 분주하다. 바쁜데 뭐 하러 오냐고 말해도 언제 오나 기다리는 것이 자식이니까. 오늘따라 1층 미용실 사장이 옥상에 널어놓은 수건이 바람에 여기저기 흩날린다. 아들도 오는 기분 좋은 마당에 내가 직접 주워 전해줘야지 했는데 그만 

내려오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난다.     


입원 후 팔에 깁스를 한 말임씨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몸을 다치고 기력이 약해지면서 

*섬망이 찾아왔다. 헛것이 보이는 엄마를 아들은 서울로 모시고 가고 싶지만 말임씨는 단호하다. 내 집이 있는데 거길 왜 가느냐. 그리하여 아들은 요양보호사 미선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섬망 : 급성 기질성 뇌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불안하고 안절부절하며 착각과 환각 등의 증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중증 치매로 오해할 수 있다. 섬망은 대부분 며칠 동안 지속되며 신체적 호전에 따라 증상이 사라지게 되지만, 때에 따라 몇 주 또는 몇 개월 간 지속될 수도 있다. 섬망의 증상 자체는 일시적이고 회복이 가능하지만, 섬망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신체적 컨디션이 좋지 않고, 뇌의 기능 역시 저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나의 효도를 대신해 주는 사람이지만 남이라 다 믿을 수 없다. 엄마가 잘 계신지, 요양보호사가 제대로 일하는지 아들은 여러 목적으로 집 안에 cctv를 설치한다. 그런데 뭔가 미심쩍다. 반찬도 금세 없어지는 것 같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욱 cctv를 보게 된다.  미선 역시 이런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불편한 

마음으로 섭섭하긴 하다.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질 때 아무리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내 집에, 내 공간에 들어오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종 부리듯 요양보호사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손님처럼 생각하여 이런저런 대접을 하느라 

신경 쓰여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진 어르신이 있는 경우처럼. 

평생 몸이 기억한 대로 살면 되기에 처음 만난 말임씨와 미선, 둘의 사이는 어색함이 흐른다. 이런 어색함이 불편한 말임씨는 미선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서글서글한 미선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처럼 말임씨에게 다정하다. 식사도 챙겨드리고, 이야기도 나누고, 옆에 앉아 과일도 함께 먹는다.

           

1. 노인장기요양등급 인정 받기 바보 맹키로 하라고?”     

그러나 말임씨는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따른 장기요양인정등급이 아직 없다.      


(*노인장기요양보험 :  치매, 중풍, 뇌졸중 등 노인성질환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을 위한 

제도이다. 65세 이상 누구나 신청할 수 있으며, 등급을 받는 1순위는 노인성질환이 있는 어르신이다. 등급에 따라 시설등급, 재가등급으로 나뉘는데 재가등급을 받은 어르신은 집에서 생활하며 주간보호센터나 방문요양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서비스 이용 요금의 85%를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하며 15%를 본인이 부담하면 된다(경제적 상황에 따라 감면).

          

그렇기에 아들은 요양보호사에 대한 비용을 100% 감당하고 있다.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장기요양인정등급이 있으면 15%에 대한 비용만 납부하면 되기에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급인정조사 신청을 한다. 아들 입장에서는 경제적 지원과 함께 나 대신 효도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 다행이다.          

신청 후에는 공단 직원이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어르신의 인지, 신체적 상황 등을 살펴보는데 혹시나 등급이 나오지 않을까 아들은 걱정스럽다. 아직 말임씨는 노인성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말임씨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엄마, 대답 제대로 하지 마! 모른다고 해”      

“그니까 바보 맹키로 있으라는 거냐”

          

침대에 누운 말임씨의 연기가 시작된다. 물론 말임씨는 고령에 따른 인지저하가 있고, 최근 낙상사고로 몸도 불편하기에 등급 인정이 될 것 같지만 그리 순순한 인정 절차가 아니다.

급성기라는 판단이 들면(즉, 2~3개월이 지나면 호전될 것으로 예상) 등급인정은 불가하다.     

여기서 어르신, 보호자와 공단 직원의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어르신의 인지 수준을 판단하기 위한 다양한 

질문에 모르쇠. 팔 들어보라는 요청에 아구구 나는 못해.

     

실제 현장을 참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거짓말은 들킬 수밖에 없다. 공단 직원이 선물을 드리기 위해 주소가 필요하다고 말하니 모르쇠로 일관하던 말임씨는 주소를 줄줄 댄다.

등급 인정으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진다.          

결국 장기요양등급은 인정되지 않고 매월 요양보호사 미선의 활동비 150만 원이 생돈으로 나간다. 희한하게 내 새끼를 위한 학원비 150만 원은 당연하지만 내 부모를 위한 돌봄비 150만 원은 아깝다. 주택 대출이자도 내야 하고, 더군다나 아들이 현재 구직 중이므로 말임씨의 며느리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 있겠다.

     

2. 말임씨는 돈줄, “효자보다 훨씬 좋은 옥매트어르신이니까 깎아 드려요!”          

말임씨는 낡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2층은 살림집으로, 1층은 미용실에 세를 주고 있다. 혼자 살지만 돈 좀 있어 보이는 말임씨를 주변에서 그냥 둘 리 없다. 병원진료 동행을 자처한 이웃이 할머니를 살살 꼬신다. 이 옥매트에 눕기만 하면 평생 속 썩였던 관절염과 통증이 싹 가신다고, 할머니니깐 특별히 깎아주겠다고.           

이런 꼬드김에 과연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하겠지만 몸이 아픈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이 다르다. 고령에 따른 인지저하로 상황판단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 관절염과 신경통으로 밤새 잠 못 이룬 날이 수두룩하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평생 일하느라 돌보지 못한 내 몸뚱이, 100만 원도 못쓸까 싶어 억울함에 지를 수도 있다.     

 

홈쇼핑에서 주문폭주, 마감임박 문구에 나도 모르게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있다면 말임씨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 이웃들만 어르신을 돈줄로 보겠는가. 요즘 더욱 많아졌다. 보이스 피싱, 신분증 도용, 각종 일명 효도 물품 판매... 아픈 몸을 꼬드겨 돈을 쓰게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마냥 욕하기 어렵다. 나 역시 센터를 운영하며 들었던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시설입니다. 어르신 건강하세요"라고 인사드리지만 현실적으로 어르신이 건강하면 

안 된다. 치매 환자 어르신들이 많아야, 그것도 중증이어야 나의 생계가 유지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타인의 

아픔과 슬픔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건 사회복지사로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어야, 학대를 당한 사람이 있어야,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내 역할이 필요하며 존재가치가 증명된다. 그에 따른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사이에 일방적인 도움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이다. 큰 돌봄의 테두리 안에서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과 덕분으로 살고 있기에 지금 내가 만나는 그분께 전문가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돈줄을 넘어 연(緣) 줄이다.

           

3. 나쁘기만 한 사람이 있는가     

요양보호사인 미선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엄마’를 돌봐야 하는 서글픈 신세다(복지관에서 근무할 때 진행했던 어린이날 행사가 생각난다. 마을의 어린이들을 위해 다양한 체험 부스를 운영했지만, 정작 우리 아들은 집에서 엄마가 퇴근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절박하고 서글픈 마음에 슬쩍슬쩍 말임씨 물건에 손을 댄다. 반찬도 슬쩍,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투도 슬쩍. 

옥매트 환불비도 잠시만 빌린다는 명목으로 슬쩍.     

그러나 자기 안위만을 위해 훔쳤다면 욕할 수도 있겠지만 미선의 사연을 보면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 엄마를 돌보다 또 다른 엄마를 돌보기 위해 명절에도 달려가는 그녀, 자신에게 함부로 말하는 말임씨에게도 어떻게든 살갑게 대하려는 그녀, 바가지를 쓴 말임씨를 대신해 환불을 도와주는 그녀를 보면 손을 잡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 정말 애썼다고.

     

그러나 미선의 노력은 당연함으로 치부되고 잘못은 죽일 년이 된다. 모든 것이 들통나 미선은 말임씨를 돌보는 일을 그만둬야 하고, 설상가상 엄마가 돌아가신다. 장례 후, 돈을 갚기 위해 찾아간 말임씨네 집. 뭔가 싸하다. 대문 틈에 돈만 놓고 가려다 혹시나 싶어 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말임씨가 쓰러져 있다. 미선이 아니었더라면 말임씨는 큰일 날 뻔했다. 미선의 잘못으로 돌봄이 부재가 되었지만 결국 미선의 방문으로 돌봄이 다시 시작된다.   

      

한없이 좋기만 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끝없이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쪽을 선택하기에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은 달라진다.                


4.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말임씨가 쓰러졌을 때 미선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집이 없어 떠돌아야 하는 미선에게 선뜻 우리 집에 같이 살자는 말임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임씨와 미선은 서로를 돌보는 관계로 확장된다.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구원이 된다.      


나는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현장에 있다. 나와 동료들이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르신도 우리를 돌본다. "나 때문에 고생해서 미안하다, 오늘 잔치집에 온 것처럼 재밌다, 챙겨줘서 고맙다"는 어르신들의 한마디에 우리의 수고가 인정받고, 존재가치가 빛난다. 어르신들은 이렇게 우리를 돌보고 있다.     

돌봄은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는다. 아기를 키우는 고단함은 '엄마'라고 부르는 아기의 목소리에 사르르 녹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수고는 꿈을 이뤄가는 듬직한 학생들을 통해 보상받는다. 밤새 야근하여 피곤할 때 동료의 커피 한잔에 위로를 얻는다. 

서로를 돌봄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세상을 견뎌 나갈 수 있다.     


5. 말임씨를 부탁한다는 요청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우리는 돌봄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서리치게 경험했다. 어린이집과 학교가 쉬면서 아이 돌봄과 교육은 모두 가정의 역할로 맡겨졌다. 장애인과 어르신의 사회활동을 돕는 복지서비스가 중단되면서(혹은 최소한으로 시행되거나 감염에 대한 책임을 돌봄 종사자와 기관에게 전가하면서) 그들은 집 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돌봄 현장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종사자에 대한 처우개선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코로나가 지나간 요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돌봄 종사자의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이고, 돌봄 현장은 청년들이 직장으로 선택하기 꺼리는 곳에 머무르고 있다. 아직 자신과 돌봄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돌봄 현장은 그들만의 세계로 여겨진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하찮은 일로 치부될 때 우리는 '말임씨를 부탁한다'는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어렵다. 

고령 또는 경력 단절된 여성이 쉽게 자격증을 취득하여 최저임금을 받고 군말없이 일하는 곳,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니 언제든 노인학대가 일어날 것이라는 편견의 눈빛,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갇힌 마음들에 균열이 생길 때 돌봄 현장과 종사자의 귀함이 드러난다. 또한 엄청난 국가 예산과 지원을 쏟아부어도 늘 체감하지 못한다는 사람들의 원성에 최소한의 대답이라도 할 수 있다. 정작 당사자는 잘 모르는 치매국가책임제, 커뮤니티케어도 오롯이 누리는 시작이 된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았고, 청장년이 되어 타인과 느슨한 관계 안에서 (사회적) 돌봄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의 돌봄을 부탁하는 늙음의 시기가 반드시 온다.     


말임 씨를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말임씨 대신 우리 부모님의 이름을 넣어도 된다. 혹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면 더욱 와닿겠다. 우리는 이 부탁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착한 거짓말이란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