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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Jan 17. 2024

13편. 어디서부터 걸어오셨어요?

[13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전날 혼자서 불안한 마음으로 몽펠리에를 떠나던 나였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하루 만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늘은 이탈리아에서 온 Joanna와 Mariella라는 두 친구와 함께였고, 불안은 설렘과 기대로 바뀌어 있었다.


확연히 달라진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날씨였다.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와 걸을 땐 연일 비만 내리더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어째 친구에게 좀 미안하다.

그래도 하늘이 하는 일을 우리가 어찌하리.

친구도 이해해 주리라 믿으며, 새로운 두 친구들과 따뜻한 햇살을 등에 업고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Joanna & Mariella

순례길을 걷다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친다.

부엔 까미노는 ‘즐거운 길 되세요!’ 란 의미로 만나는 순례자들끼리 하루에도 몇 번씩 나누는 인사말이다. 간단한 인사를 뒤로 하고 묵묵히 혼자 가던 길을 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 같이 걷고 싶은 날도 있다. 그렇게 순례자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을 때 자연스레 묻게 되는 질문들이 몇 가지 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어느 나라 분이세요?

그다음으로 꼭 묻게 되는 질문이 바로 

‘어디서부터 걸어오셨어요?’다.   

   

마지막 질문은 여러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는지, 때론 집이 어딘지, 또 다양한 순례 루트 중에서 어느 길을 선택해서 왔는지도 알 수 있다. Joanna와 Mariella에게 앞의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얻었으니 이제 세 번째 질문만 남았다. 난 걸으며 물었다.      


“두 분은 어디서부터 걸어오셨어요?”

Joanna가 대답했다.

“저희는 Monpellier에서부터 걸어왔답니다.”


아하! 왜 하필 몽펠리에였을까 궁금하던 찰나 Joanna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2015년에 저의 집인 이탈리아 아바리(Chiavari)에서 로마(Rome)까지 걸었어요. 그리고 2016년에 다시 집에서부터 프랑스 국경까지 걸었죠. 그런 뒤 2017년엔 바로 옆에 있는 Mariella와 프랑스 국경에서부터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까지 걸었어요.

그런 뒤 Mariella는 집으로 돌아갔고, 저는 몽펠리에(Montpellier)까지 계속 걸어 나갔죠.

그리고 작년에 저희가 서로 너무 케미가 좋아서 올 해도 이렇게 함께 걷게 되었답니다. 2018년 올 해엔 뚤루즈(Toulouse)까지 걸을 예정이에요. 드디어 내년엔 이어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걸을 생각이구요.”     


아하! 이렇듯 땅이 서로 이어져있는 유럽 친구들에게는 집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리 낯선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산티아고까지 한 번에 걸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나누어 걷기도 했다.

나중에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순례객을 많이 만났다. 걷기 시작한 지 한 30일쯤 되던 때 스페인에서 만난 70대 네덜란드 여성 분은 3월에 네덜란드 집에서 출발해 5월에 나와 조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처럼 바다 건너 멀리서 온 동양인들은

보통 어디서부터 출발할까? 동양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산티아고 도보순례자들에게 단연코 가장 인기 있는 길은 프랑스길(Camino Frances)이다.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대략 40일간의 순례 코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그 루트를 선택해 걷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남프랑스 아를길에서 동양인을 만난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를 길에서 내가 만났던 친구들은 캐나다, 이탈리아, 독일,프랑스분들로 모두 서양인이었다. 그래서 아를에서 길을 걷기 시작한 지 대략 한 달간은 한국어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아를길에서 나를 만났던 서양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신기하고 궁금했을까?

한국인이.

여자 혼자서.

그것도 아를에서 왜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후로도 나는 줄곧 같은 질문을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수만큼 받았다. 덕분에 이 질문에 대해서 만큼은 거의 반자동적으로 유창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이제 Joanna와 Mariella에게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들려줄 차례였다.      

잘 못하는 불어의 r발음(목구멍에서 내는 ‘흐’와 ‘르’의 중간 발음)을 최대한 살려 발음하며 말했다.


“저는 아흐ㄹ(Arles)에서 출발했어요.”


“Arles이요? 왜 거기서 출발했어요?”


반 고흐의 미술 작품을 보고 처음으로 치유를 경험했거든요. 그래서 고흐의 숨결이 살아있는 아를에서 출발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마침

Via Tolosana 아를길이 있지 뭐예요?


“빈센트 반 고흐, 참 대단한 예술가네요. 한 점의 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이 먼 곳까지 오게 하다니...”     

 

맞다. 자신의 고통을 재능으로 승화시켜 나를 치유해 준 반 고흐, 그는 대단했다. 그리고 길 위의 친구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게 뱉어낸 그의 그림을 향한 칭송들이 나에게 치유의 경험을 안겨준 그에게 작지만 값진 보답이 되었으면 했다. 조금 더 욕심을 보태어, 살아생전 상처받은 그의 영혼을 이번엔 내가 잠시나마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다면.. 더없이 뿌듯했을 것 같다.     


이처럼 상처 입은 한 영혼의 포기하지 않은 날갯짓은

상처 입은 또 다른 영혼을 치유하는

둘도 없는 고약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순례 루트

지금도 난 아를에서 출발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 산티아고 순례를 준비하는 분이 계시다면 출발점이 꼭 생장드포드일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성당 주보에 산티아고 도보순례 여행 광고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대부분 7~10일 동안 산티아고 도착 전 100km를 걸어 보는 코스다.

그래야 산티아고 순례국에서 도보 순례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모집광고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혼잣말을 되뇐다.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구간들 중 마지막 100km에 속한 마을은 없는데.

좀 더 정확히는 그 구간보다 더 다양한 다른 매력을 가진 길들이 많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니, 좀 더 솔직히는 '종이 증서를 받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 하나뿐인 나만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다.


내겐 남프랑스 아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프랑스 레옹일 수도, 영국이나 포르투갈의 한 도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산티아고까지 꼭 한 번에 갈 필요도 없었다.


혹시라도 순례를 계획하고 계신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순례지도를 만들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 중 그 누구의 인생길도 같지 않듯이.

그래서 우리 각자의 인생은 모두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듯이.

그러니 애당초 그 누구의 길과 나의 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듯이.


조안나 & 나 & 마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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