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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Apr 17. 2024

24편. 몸이 힘든 게 나을까? 아니면 마음이..

[24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부쩍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나누는 횟수가 잦아졌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둘만 한다는 얘기다. 보통은 조안나가 영어로 통역을 해주곤 했는데 어쩐지 그것도 생략이다.


여러 생각이 오간다. 둘 사이 정확한 소통이 필요한 상황이겠지. 이해하다가도 혹시 나는 알면 안 되는 얘기라도 하는 건가?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스물스물. 에잇! 궁금해서 더는 못 참겠다.


“조안나, 아우토부스라는 소리가 자꾸 들리던데 그건 이탈리아어로 무슨 뜻이에요? 10월(악토버)인가요?” 슬쩍 돌려 물어본다. “아.. 그건 버스(autobus)라는 뜻이에요. 이탈리아로 돌아갈 버스랑 기차를 예약하는 중이거든요.”      

아하! 그랬다. 조안나와 마리엘라는 올해 Monpellier(몽펠리에)에서 Toulouse(뚤루즈)까지만 걷는다고 했지?

우리 셋이 함께 걸은 지도 어느덧 12일.

그리고 이틀 후면 뚤루즈 도착.

그러니 그녀들은 슬슬 이탈리아로 돌아갈 기차며 버스를 예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2주 동안 매일 24시간을 꼬박 동고동락했던 정든 친구들과의 이별을 나도 서서히 준비해야 했다.     


오늘따라 우리가 걷는 길에는 도보 순례자 외에 러너나 사이클리스트들이 많이 보였다. 그건 우리가 점차 뚤루즈라는 대도시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로를 따라 높게 늘어선 나무들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걷다가 우린 긴 수염에 검정 모자, 검정 판초우의 그리고 지팡이를 든 프랑스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딱 마법사 같은 느낌이 폴폴.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는데, 아저씨 눈엔 내가 더 이상한가 보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신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왜 저렇게 빤히 보시지? 사람 민망하게. 그런데 갑자기 아저씨가 사과 하나를 건네신다. 작지만 빨갛고 탐스런 사과. 오늘 수분 보충은 이걸로 낙찰!


그리고 나더니 아저씨는 내 눈 쪽을 가리키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신다. 아하! 아저씨 내 선글라스가 맘에 쏘옥 드셨던 거구나. 아저씨 보는 눈 좀 있으시네..

난 자부심을 한껏 뽐내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어머! 근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한쪽 알이 빠지고 없었다. 알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계속 쓰고 있었다니! 그러니 아저씨 눈엔 외꾸눈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폭소를 안 터뜨리신 걸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

안경알 하나를 잃고,

빨간 사과 하나를 얻었다.    

  

사실 오늘은 지금까지 중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33km. 보통은 15km에서 25km를 걸었다. 그래도 그간 체력이 길러졌으니 괜찮겠거니 했는데 영 몸이 이상했다. 25km 지점을 지나고부터는 현저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항상 조안나가 앞서 걸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내 시야 안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은 저기 길가에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항상 나보다 뒤에 걷던 마리엘라도 어느새 내 옆을 지나간다.


마리엘라,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갈게요.” 마리엘라를 앞세워 보내고 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배낭을 바닥에 던져놓고 주저앉았다. 앞서 가던 마리엘라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나의 이탈리아 엄마. 길에서 만난 한국 딸이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셨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돌아와 준 마리엘라 때문에라도 다시 힘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아...”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간신히 한 걸음을 떼던 내게 마리엘라가 말했다.   

포도알! 자, 여기 팔짱을 끼고

  내게 몸을 좀 기대 봐요!”      


마리엘라도 자신의 배낭 무게가 만만치 않을 텐데 내게 몸을 기대란다. 그래도 될지 너무 미안했지만 염치없이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마이엘라의 팔짱은 효과를 즉각 발휘했다. 신기했다.      


마리엘라에게 어깨 마사지를 해주던 날 자기를 이제부터 ‘이탈리안 맘’이라고 부르라는 말이 그냥 말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길 위의 나의 엄마가 되어주었다. 한국의 울 엄마가 내어주었을 그 마음으로 나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 주셨다.


팔짱에 닿는 온기는 따뜻했고 아무렴 괜찮다는 듯 지어주던 미소도 한없이 푸근했다.

나의 이탈리안 맘, 마리엘라의 팔짱이 없었다면

그날 과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역시 엄마의 힘은 크다. 아니, 위대하다.     

한참을 늦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들어선 나를 숙소 봉사자 아주머니와 조안나, 그리고 아까 사과를 건네주던 스테판 메종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리엘라가 간단히 늦게 된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 얘기를 들은 숙소 봉사자 아주머니가 내 팔을 끌어 의자에 앉히고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신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내 얼굴에서

환한 웃음을 건져내주었다.


그러더니 숙소 명부에 이름과 나이를 적는데 아주머니가 진지하게 20이라고 적는다. 내가 깔깔 웃으며 아니라고 다시금 나이를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30이라고 또 잘못 적으신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얘기를 했더니 갑자기 쥐고 있던 펜을 탁! 내려놓고 눈동자까지 굴리시며 “언벌리버블!”을 외치신다.

이 분 오늘 작정하신 것 같다.

힘들었을 내게 웃음꽃을 다발로 선물하기로.     

오늘 하루치 미션을 우여곡절 끝에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 스테판 메종 아저씨는 작년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가 걸으셨던 순례길을 자신도 따라 걷는 중이시란다.

고흐 덕분에 아를에서부터 걸어와 혼자 산티아고까지 두 달 반을 걸을 예정이라는 말에 이건 ‘영화’라며 추켜 세워 주신다.


오늘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내가 저녁을 허겁지겁 먹었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디저트 한 조각을 더 먹겠냐고 물어오셨다. 다들 거절하셨는데 나는 “Yes, please!”를 외쳤다. 그랬더니 잘 먹어서 너어어무 예쁘다고 먹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신다.

사실 잘 먹어서 예쁘다는 칭찬은 난생처음. 그래서 더 싱글벙글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분에게서도 영락없이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엄마의 모습이 느껴졌다.


33km를 완주한 그날 밤 난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Today is the physically hardest,

but emotionally happiest day!


몸은 정말 힘든 하루였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던 날.      

요즘 순례기를 쓰면서 몇 년 전 그날들과 현재 나의 일상이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지난주 감기와 바쁜 학교 일로 잠도 부족하고 몸은 몸대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결국 글 발행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새벽 루틴을 감행하며 성당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모습에

“브런치고 새벽루틴이고 다 그만둬야 하나.”

체력적 한계를 느끼던 그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세 분께 깜짝 선물을 받았다.      


모닝 카페인을 채우러 간 카페에서 우연히 성당 신부님과 마주쳤다. 중요한 일을 하시는데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린다며 커피 선물을 건네시는 감사한 응원의 마음. 학교에 왔더니 봄이라 스카프를 샀는데 1+1이라 하나 드려요. 하시며 내 목건강까지 챙겨주시던 따뜻한 마음. “제 마음이에요”라며 알찬 브런치박스를 수줍게 건네주시던, 내게 마음의 짐을 갖고 계시던 분의 겸손한 마음.


나의 약해지려던 마음에 불끈 힘을 주시던 분들 덕분에 난 육체적 한계 지점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몸이 힘든 게 나을까, 마음이 힘든 게 나을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하게 될 것 같다.   

   

배낭이 무겁다면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면 그만이지만, 보이지 않는 어둔 마음의 무게는 내려놓고 싶어도 수이 놓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에너지 소모 제로인 상태로 침대와 하나 되어 누워있으면서도 미움과 원망으로 단단해진 마음의 무게를 덜지 못해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날의

속 좁은 나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기에.          



한 주가 지난 오늘, 브런치 팀으로부터 받은 알림 메시지는 오늘 글의 화룡점정이 되었다. 글쎄 내게 연두색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배지를 달아주신 거다. 위태로운 순간, 정말 완벽한 타이밍에 큰 힘을 실어주신 브런치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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