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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Apr 04. 2024

23화. 순례객에게 노동절이란

[23편]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남프랑스와 스페인 순례자 숙소의 매력은 확연히 다르다. 스페인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잘 수 있단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큰 규모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길답게 대중성이 잘 갖춰져 있다.


반면 남프랑스 숙소는 소소하며 저마다의 개성이 가득했다. 그래서 대규모 모임보다 소모임이 편안한 나에게 남프랑스 숙소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남프랑스 Revel 마을의 지트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서려는데 두 봉사자 노부부가 아침부터 깜짝 제안을 한다.


작은 도자기 함을 건네면서 열어보란다. 안에는 세 장의 종이가 잘 접혀 있었다. 조안나와 마리엘라 그리고 나, 우리 셋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같았다. 내가 먼저 그중 한 장을 뽑아 펼쳤다. 뭔가 쓰여 있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프랑스 답게 역시나 불어다.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내가 뽑은 메시지를 영어로 번역해 줬다.      


"길 위의 즐거움이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

     

길을 나서는 순례객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으신 두 분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 긍정적인 에너지를 감사히 받아 안고 길을 나섰다. 어제 비가 온 뒤라 하늘이 맑고 구름이 참 예뻤다.


어제처럼 오늘도 15km라는 짧은 거리라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Saint-Felix-Lauragais 마을의 시내까지 들어가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시내의 성당을 둘러보고,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멋진 전망대의 풍경을 즐긴 후 우린 그날 저녁과 다음 날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빵집과 슈퍼를 찾았다.


하지만 애써 걸은 수고로움에 비해 힘 빠지는 결과였다. 벌써 상점이 문을 다 닫았단다.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인데도 말이다.  


실은 다음 날은 프랑스 최대 공휴일인 5월 1일 노동절(May Day)이었다. 프랑스의 대대적인 휴일이라 거의 모든 상점과 레스토랑, 행정기관들은 모두 올스톱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전날 다 미리 사두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다행히 젊은 숙소 주인들에게 우리의 상황을 전하니 굶주린 순례객에게 뚝딱 파스타를 만들어 주셨다. 이렇게 감사할 때가. 눈물 나게 맛있었다.

배를 채우고 주인장은 묵을 숙소로 우릴 안내했다. 그런데 오늘 숙소는 어째 포스가 많이 남다르다. 리더 조안나는 오늘도 숙소 선택에 있어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와우! 난생처음 몽골식 게르에서 자 보게 생겼다. 것두 남프랑스 한복판에서 두 명의 이탈리안들과 코리안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조합인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엉뚱해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재밌는 상황. 장작을 넣어 불을 때는 화로가 낭만적으로 보인건 사실이었지만 피부에 와닿는 현실은 좀 추웠다.

하지만 낭만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왔다. 몽골식 게르의 천장은 한가운데가 투명한 비닐로 메워져 있었는데 마침 저녁을 먹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후두둑 천장 비닐에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던 낭만의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안나의 숙소 픽에 깃든 장난기가 새삼 고마웠던 밤을 뒤로하고 다음 날 Segal을 향해 길을 나섰다. 오늘은 노동절 당일. 조안나가 예약한 에어 비앤비 숙소 옆에 레스토랑이 4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서둘러 갔다.


그런데 에고고 어쩌나. 식사가 안 되고 음료만 가능하단다. 그나저나 어제도 식량을 살 길이 없어 쟁여 뒀던 넛츠바랑 치즈를 점심으로 다 먹어 버려 당장 저녁거리가 동이 난 상태. 일단 열량 높은 핫쵸코를 마시며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머리를 굴려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을 것을 살 곳은 없고, 그렇다고 6시간 넘게 걷느라 기진맥진한 순례객에게 단식은 너무 가혹한 벌이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이 되는 걸까?


그렇대도 조안나가 선택한 방법은 나에겐 신세계였다. 고민 끝에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아주 당당하고 용감하게 웨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저희가 지금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는데..

저기 남는 바게트 빵이라도 주실 수 없을까요?


그녀가 시도한 방법은 다름 아닌 동냥이었다. 하하하!

그런데 또 맘씨 좋은 점원은 딱한 순례객을 위해 순순히 바게트빵을 내준다. 조안나의 비상식량 스프를 따끈하게 끓여 동냥해서 얻은 바게트빵을 찍어 먹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표현할 길이 없다.     


노동절날 프랑스 사람들은 은방울꽃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린 은방울꽃 대신 순례객에게 꼭 필요한 일용할 무료 식량을 선물 받았다.


Revel 마을 지트에서 뽑은 메시지

길 위의 즐거움이 너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은방울꽃의 꽃말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이 두 메시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질 따뜻한 마음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미리 예비해 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펼쳐질 즐거움과 행복을 그리며

내일도 Buen Camino!

은방울꽃 <블로그 PARIS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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