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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r 27. 2024

22편.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

[22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오늘은 일요일. 한 동안 미사를 못 봐 아쉬웠는데 오늘은 오전 미사를 드리고 출발할 수 있단다. 기뻤다. 남프랑스 산골 성당들은 아예 미사가 없는 경우가 많아 영혼에 조금씩 갈증이 올라오던 터라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기상 상황에 변동이 생겼단다. 오전엔 비가 안 오고 오후엔 많은 양의 비 예보가 있단다. 그러니 아침에 빨리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게 조안나의 의견. 잔뜩 낀 먹구름만큼 아쉬움도 짙었다. 하지만 어떡하랴. 우산이 아닌 온몸으로 폭우를 견뎌내야 하는 순례객이기에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린 서둘러 길을 나섰다. 흐린 하늘 때문일까.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 때문일까. 그도 아님 내려놓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셋 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 발에만 집중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우리의 침묵을 깨 주었다.


“어머! 여기 좀 봐요!”

오묘한 보랏빛 물결.

바로 드넓은 라벤더 밭이었다.


6월에 만개하는 라벤더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라벤더 밭은 서둘러 가던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묶어 두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서운한 마음 풀어~’     


평소 진정 작용이 있는 라벤더 향을 좋아했지만 꽃말의 의미는 몰랐다. 라벤더의 꽃말은 ‘침묵’과 ‘대답해 주세요’라고 한다. 그래서 불면증에도 효과가 있는 걸까? 암튼 그 유래도 재미있다.     

옛날 어느 나라의 공주가 타국의 왕자를 사랑했단다. 왕자는 공주에게 미소를 짓는 등 호감을 보였지만 공주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말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왕자의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공주는 왕자에게 떠나기 전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왕자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떠났단다. 전쟁에서 왕자의 나라는 이겼지만 왕자는 전사했고, 그 사실을 안 공주는 절망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나중에 공주가 죽은 자리에서 라벤더란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한편 공주보다 먼저 죽게 된 왕자도 공주를 사랑했지만 벙어리였고 수줍음을 타서 공주의 고백에 늘 대답하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다.     
                                                          <나무위키 발췌>


라벤더 꽃말의 의미를 알고 나니 라벤더가 건네 온 말에 나라도 침묵을 깨고 꼭 대답해주고 싶었다.

알겠어! 너희 덕분에 서운한 마음 다 날려 보냈어. 고마워!!’    

라벤더 밭으로부터 건네받은 청량감 덕분에 발걸음도 가벼워진 탓인지 우린 생각보다 많이 일찍 도착했다. Revel 마을에서 묵을 Gite 문이 아직 닫혀 있었다.


비를 피하며 기다리기 좋은 장소를 찾았다. 출출함을 달랠 키쉬를 사서 관광청 사무소 지붕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걷고 난 뒤 먹는 점심은 꿀맛이다. 배를 채우고 다시 가 보니 지트 문이 열렸다.


이곳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두 노 부부는 아를길에서 보기 힘든 동양인 여자 순례객인 내게 용기 있다고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시며 극진히 대접해 주신다.   

비에 젖은 옷가지를 빨아 널어 둔 뒤 10개 정도 되는 침대 중 어딜 쓸까 둘러보고 있는데, 방명록을 보고 있던 조안나의 눈이 순간 반짝인다. 방명록의 기록을 통해 아주 유명한 탐험가가 얼마 전 이곳에서 묵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순례를 직업으로 삼은 유명 유튜버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더니 조안나의 궁금증이 발동했다.      


근데 그분 이 침대들 중 어디에 그의 짐을 풀었을까?


그의 탐험가적 기운이 조안나에게도 스며들길 바랐던 걸까? 그 침대를 찾아 자신도 그 침대를 쓰고 싶은 바람이 이글이글 눈에 묻어났다. 그런 조안나의 엉뚱한 질문은 침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사실 그전까지 매일 다른 숙소의 침대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침대 깨끗하겠지? 베드버그는 없겠지?”

워낙 베드버그에 물린 순례객의 에피소드가 많기도 했고, 한 침대를 매일 다른 순례객이 쓰니 나도 모르게 위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침대 위 벌레가 내게 옮아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매일 새로 세탁한 시트를 갈아 주심에도 말이다.      


그런데 조안나 덕분에 발상의 전환이 됐다.

어젯밤 이 침대를 썼던 사람은 어떤 분이었을까?”를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따뜻하고 진취적인 기운이

내게도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침대가 달리 보였다.      


BTS 멤버가 다녀간 미술관을 가 보게 되는 것도, 유명한 영화 촬영지를 방문해 보게 되는 것도,

좋아하는 선수가 던진 야구공이 내 손안에 들어왔을 때도 다 같은 마음이 아닐까.

작품이나 물건 자체에 대한 애정도 있겠지만,

그 공간에 서려있는 누군가의 좋은 기운을 느끼고 붙잡고 싶은 마음은 아닐지.  

   

학교에서도 간혹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사건 사고가 자꾸 터져 시끄러운 반을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년에도 그 반이 좀 그랬잖아요. 혹시 그 교실 터가 그런 걸까요?’ 우스갯소리로 한 말들이지만 우스갯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엊그제 새로 이사 갈 집 계약을 했다.

마침 이 글을 쓰면서 과연 나는 뒤를 이어 이 공간에 살게 되실 분들에게 좋은 기운을 남겨 드리고 갈 수 있을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올라왔다.


사실 지금 집에 사는 동안 감사한 일들이 많았다.

특히 항상 한결같은 기도와 인내의 시간으로 메워진 어머니 방에 들어서면 안정되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방문하신 분들은 입을 모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한없이 부족하다.

남은 두 달의 시간 이라도

더 긍정적인 생각,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머무는 공간을 채워보리라 다짐해 본다.


순례길에서 받은 숱한 아름다운 기운들을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는 내가 되었음에 감사하며.   

                                     

Day 18: Dourgne Revel 15.5km (29/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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