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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r 20. 2024

[번외편] 기도가 안 되어 다행이다.

 

어느덧 아침 루틴이 정착된 지 일 년이 넘었다.

작년 3월 2일 개학 날 ‘일단 한 번 해보고 아님 말지 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미라클 모닝 루틴.

사흘 만에 그만둬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내겐

크나큰 도전, 4시 30분 기상.

그 말도 안 되던 루틴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저 신비다.     


4시 30분 기상 (출근 준비 및 간단한 아침 도시락 준비)

5시 20분 성당으로 출발

6시 미사

6시 40분~7시 50분 고요한 성당에서 아침 기도

8시 출근     


지난 금요일 여느 때처럼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마음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할수록

속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오늘따라 성당이 너무 춥네.

따뜻해진 낮 기온에 맞춰 다소 가벼운 옷을 입고 나왔는데 아직 새벽엔 이른 복장이군. 게다가 매일 가져오던 핫팩까지 오늘은 놓쳤네. 아이 추워.     


한 번 벌어진 틈새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오늘 사춘기가 절정에 이른 반항기 가득한

한 남학생의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대화를 잘 이끌어가야 할 텐데. 잘할 수 있을까?

스탑! 걱정은 주님께 맡겨드리자. 집중!      


그러나 또다시 갈라지는 마음. 왜 이리 졸리지?

이틀 째 글 쓰느라 새벽 1시에 잤으니 당연히 그렇지. 그럼 학교 일을 하며 글까지 써보겠다고

하는 건 욕심일까? 도리도리. 제발 집중!      


아~ 오늘 왜 이러지? 너무 집중이 안되네.

잠깐 밖에 나가서 냉수라도 마시고 올까?

아니야, 애써 잡아놓은 고요함마저도 깨질 수 있어. 다시 집중!      


그러나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며 애를 쓰다 시계를 보니 어머! 벌써 출근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에구. 오늘은 글렀다. 근데 오늘 내가 왜 이러지?


시간을 그냥 헛되이 날린 것 같아

스스로를 다그치는 마음이 올라오려던 찰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반박해 왔다.     


한 주 동안 새 학기를 맞아 긴장상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잖아. 포도알!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라 토닥임이야. 포도알! 너무 고생 많았어.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이렇게 새벽 시간을 봉헌하다니.

포도알! 정말 멋져! 그런 네게 오늘은

    따뜻한 라떼 한 잔 선물해 주는 건 어때?     

풍성한 우유 거품이 얹어진 부드럽고 쌉싸름한 라떼 한 모금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같은 교무실을 쓰시는 여섯 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나만 애쓴 게 아니지.

아이들 지도하다 넘어져서 십자인대까지 파열된 역사선생님 얼굴도 스쳤다.

어떻게든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 행복한 금요일!

울 교무실 선생님들께 깜짝 커피 선물을 배달하는 거야.      


8시 40분까지만 출근하면 되는데,

8시가 되면 일곱 분 중 다섯 분이 와 계시는 울 교무실. 커피선물을 들고 들어서니 소프라노 톤의

큰 리액션으로 작디작은 마음을 받아주신다.

카푸치노가 넘 맛있다며 미소로 화답해 주시는 음악선생님. 인대파열로 고정기구를 착용하시고도 깔깔깔 호탕한 웃음으로 환대해 주신 역사선생님. 아침부터 운동장에서 아이들 지도에 열 일하며

다 식은 라떼를 드시면서도 정말 맛있었다고

화답해 주신 체육선생님.


그분들의 얼굴에 지어주신 환한 미소가

   지친 금요일 내게 행복이 되어 돌아왔다.   

사실 잘 된 기도와

잘 안 된 기도가 따로 있을까 싶다. 

좁디좁은 내 마음에

보다 진실된 사랑을 심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라면, 어쩌면 그날의 기도는

잘 된 기도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잘 된 기도가 아니어도 좋다.

덕분에 나 자신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또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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