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도 제철이 있다면 언제일까?
'제철 음식'이라는 표현이 있다. 제철 과일, 제철 생선, 제철 곡식. 봄에는 주꾸미, 달래, 바지락, 각종 봄채소. 여름에는 수박, 복숭아, 포도 등 여름과일과 옥수수를 빼면 아쉽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며느리들아 돌아오라 전어, 사과, 배, 감. 겨울에는 단연 딸기와 귤이다. 세상 살면서 제철 음식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나였지만, 딸아이의 먹거리로 생각하면 시장에서 제철 음식에 절로 눈이 간다.
금년 한 해는 제철 음식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겨울에 절대 접시를 물릴 일이 없는 딸기를 시작으로, 여름에는 수박과 옥수수, 포도에게 도움을 받았고, 가을의 사과와 배, 감에게 감사한다. 특히 옥수수와 포도는 딸아이의 최애 간식으로 이름을 올려 가을 초입에 와서도 계속 찾고 있다.
'제철'이란 무엇인가? 과일, 곡식, 생선 등이 가장 크고 맛있고 힘찬 시기다. 이때 아니면 보기 힘든 것도 많다. 즉, 제철에 찾아야 먹을 수 있고, 가장 맛있으며, 쉽게 구할 수 있고, 제 가격에 살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전성기가 아닐까?
사람에게도 제철이 있다면 언제일까? 어제 발목 접질려서 절뚝대다가 내일 축구하러 뛰어 나가는 10대 후반일까? 성인이 되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마음만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20대 일까? 사회에서 얻어터지고 사람에게 치여 닳고 닳아 조심성이 깊어진 30대 일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제철. 그것은 40대는 아닐 것이다.
일본 음식점에 가서 라멘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켤 때,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내에게 내가 한 말은 "안 보여"였다. 라멘 그릇 바닥에 있는 면발과 건더기가 못 알아볼 정도로 흐릿했다. 시력 1.5 ~ 2.0을 자랑하는 몽골인 눈까리였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결국 나는 돋보기안경이라는 것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가 장난치며 휘익 휘익 휘두르던 제본 스프링에 긁힌 오른팔의 상처는 2개월이 넘도록 아물지 않는다.
왼쪽 다리가 저리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왼쪽 골반에 창으로 쿡쿡 찔리는 느낌이 나더니, 허리 디스크 3개가 터졌다고 한다. MRI 비용이 무서워서 이것도 한참만에 확인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 유튜브를 보고 있자면 양쪽 어깨부터 찌릿찌릿 울리더니 무엇이라 콕 집을 수 없는 감정이 차올라 눈물로 흐르게 된다. 특히나 가족이나 아이들을 주제로 한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몸에 수분을 다 뺏길 것 같아서 한편을 다 못 보고 끄게 된다.
인정한다. 나의 제철은 아마 한참 전에 나도 모르게 지났을 것이다. 친구들이 최고였던 10대였는지, 독인지 꿀인지 모를 어른의 맛을 느낀 20대였는지, 이제 멀어지는 것을 느꼈던 30대였는지.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아직 제철이다!라고 외치는 대신 제철이 지났음을 인정하고 오래 살아남을 궁리를 한다. 제철이 지났어도 가판대에 올라서 나를 팔아야 한다. 나의 딸은 이제 26개월이 되었다. 나는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나를 잘 팔아서 내 딸의 집, 교육, 음식, 옷, 장난감, 간식, 오락, 취미 그리고 웃음을 지켜야 한다.
40대 중반 문턱에 들어선 나의 이력서는 점점 비굴해지고 있다. 한참 전에 철이 지나서 찾는 사람도 많이 없거니와 먹을만한지 보장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철이 지나 비싸다. 이런 나를 찾는 소비자를 찾아 오늘도 나는 가판대에서 소리친다.
"나 아직 쓸만해요!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