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로비스 코린트 <화장대의 샤로테 코린트>
토요일 아침마다 잠시 외출을 한다. 가족들에게 붙잡힐 세라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까치발을 들고 몰래 집을 나선다. 홀로 즐기는 달달한 일탈은 감춰진 보물처럼, 은밀한 편지처럼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약속 (?) 시간에 늦을까 서둘러 차를 몰고 들어간 곳은 바로 집 근처 영화관. 그곳에서 일주일치 살아갈 힘을 충전한다.
이제 까지 보아온 영화 중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의 한 장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덴마크 작가인 카렌 블릭센(1885-1962)은 젊은 시절 남편을 따라 케냐로 갔다.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을 하고, 홀로 커피 농장을 꾸려나가던 중 운명의 남자와 조우하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데니스 핀치 해튼. 그와 꿈같은 사랑을 한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로 그를 잃는다. 카피농장도 파산한다. 다시 덴마크로 발길을 돌린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1937년에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제목의 러브스토리를 발표한다. 소설은 1985년 미국의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다. 카렌(메릴 스트립 분)과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은 영화에 대한 감동을 한층 더 부풀려준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풍경, 석양에 붉게 물든 지평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노란 경비행기를 타고 연분홍 홍학 떼 위를 비행하는 두 사람...... 이들 장면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데니스가 카렌의 긴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은 오랜동안 진한 커피 향처럼 남았다.
카렌을 의자에 앉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겨주는 데니스. 특히 하얀 물병에 담긴 물로 거품 가득한 머리카락을 헹구어 주는 장면에서는 '부러움 반 설렘 반'으로 심장이 마구 들썩였다.
한편, 자신의 머리카락을 연인에게 맡긴 카렌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세심한 손길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편안함과 충족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채웠다.
이 가슴 떨리는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 몇 번이나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연인의 머리카락을 만진다는 것은 가장 에로틱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함부르크의 어느 미술관에서 ‘이 영화의 바로 그 장면’과 너무나 흡사한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림을 소개하는 캡션을 보니, 작품명이 <화장대의 샤로테 코린트(Charlotte Corinth at her dressing table)>(1911)였다. 화가는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 1858–1925). 생소했다.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로비스는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다. 19세기말, 독일의 보수적인 미술계에 반기를 든 예술가 집단인 ‘베를린 분리파’의 수장으로, 독일 인상파와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풍경, 정물, 누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특히 종교나 역사, 문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독창적인 묘사로 당시 미술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화장대 앞에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앉아 있다. 분을 바르고 있는 것을 보니,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여왕을 보필하는 전속 미용사처럼 여인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겨주고 있다. 여인의 화려한 외출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는 손길은 자칫 그녀의 귀한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다칠세라 조심조심 섬세하기만 하다(혹 시드니 폴락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이 그림을 본 것은 아닐까? 구도며 분위기가 거의 데칼코마니 수준이다). 파스텔 색상의 실내는 여인의 갈색 머리카락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두 남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누구일까?
1901년, 로비스는 베를린에 여성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운다. 그때 샤로테(Charlotte Berend-Corinth,
1880~1967)라는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그녀가 화가의 꿈을 안고 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소녀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 풍성하고 탐스러운 긴 갈색머리의 이 학생에게 로비스는 매료되었고, 곧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1903년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는다. 코린트가 마흔다섯, 샤로테는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띠동갑을 훨씬 넘어 스물두 살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이쯤 되면 '도둑놈'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샤로테는 평생 그의 모델이었으며, 영혼의 단짝이 되어 주었다. 나이 어린 새색시가 너무 예뻤던 코린트는 결혼을 하고 이전에 그렸던 풍경화에서 등을 돌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리는데 집중했다. <화장대의 샤로테 코린트>도 그중의 하나다.
두 사람 뒤로 드리워진 커튼이 환한 햇살을 머금고 있다. 아내의 하얀 드레스가 실내로 들어온 밝은 빛을 품는다. 구름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햇살처럼 얇은 옷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살구빛 피부가 사랑스럽다. 홍조를 띤 얼굴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여성 특유의 여유로움이 담겨 있다. 온화한 표정에서 부부의 유대감이 묻어난다. 그림이 신혼의 달콤함으로 따사롭다.
이들의 달보드레한 시간은 오래지 않아 위기를 맞이한다. 이 그림을 완성한 1911년, 로비스에게 ‘뇌졸중’이라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발병의 원인은 폭음이었다. 그는 평소 엄청난 양의 와인과 샴페인을 달고 살았다. 비록 몸의 반쪽(오른쪽)이 마비되었지만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여왕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살뜰하게 챙겼다.
이 대신 잇몸이었다. 병마도 열정을 꺾지 못했다. 왼손으로 적응하고 일어선 로비스는 화가로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붓놀림은 더욱 강렬해졌다. 아내의 머리카락처럼 소용돌이치는 선과 극적인 색상 대비. 이는 신체적 장애로 인한 불안감과 내면의 갈등을 대변하는 빼어난 표현 도구였다.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의 작품은 오히려 감상자들을 매료시켰다.
남편을 위해 염색약을 샀다. 3주 전에 새치 염색을 해주었는데, 이른 아침 출근하는 그의 정수리엔 반갑지 않은 하얀 꽃들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그가 좋아하는 야구중계를 틀어놓고 꼼꼼하게 사랑 표현이나 해주어야겠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의 2악장 - 모차르트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배경음악으로 알려진 곡입니다. 200년 전에 작곡된 이 곡은 마치 이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듯합니다. 영상은 석양이 붉게 물든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비추고, 그 위로 아름다운 클라리넷 선율이 잔잔하게 흐릅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1791년에 작곡했습니다. 열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기 두 달 전에 완성했다지요. 짧은 35년의 생에서 마지막으로 작곡한 협주곡이기도 합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는 참담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려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기 바빴고, 갑자기 생긴 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요. 그런 와중에도 음악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겪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로비스 코린트처럼요. 마침내 인류를 위해 자신을 위해 큰 선물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그의 음악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해줍니다.
https://youtu.be/3y0esQe2BnI?si=pZBfXfVpf-w6NAW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