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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감독 김소형 Sep 15. 2023

드라마 예술감독의
      [느낌대로!클래식]

추억-소녀의 기도

'네 선생님~~ 하하 호호'

"네? 소녀의 기도요? 그 누구나 한 번씩은 치던 그...?"

"네~선생님~~ 그 곡 맞아요~선생님~하하 호호~"

나의 놀란 목소리에 대한 고려함은 1도 없는, 너무나 친절한 옆집 공주님 같은 우리 오지영 작가님..

그저 해맑게 하하 호호 웃으신다.

https://youtu.be/QL6LXVHviTY?feature=shared

KBS 드라마 '도도솔솔라라솔' 중 '소녀의 기도'-  연주, 편곡 김소형

드라마 밀회 이후, 그래도 이왕이면 낯선 곡들을 대중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조금은 아로간트한 강박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난해하고 심오하면 안 되고 너무 익숙하고 식상해도 안되고 대중의 평균적인 눈높이에 맞추는 작업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녀의 기도는 내 기준에서는 썩 내키지 않는 곡이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서 뚱땅거리는 이쁘고 귀여운 여자아이의 그림을 떨쳐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게.. 선생님~~ 창고 주인 만복 할아버지가 사연이 있어요 선생님~~"


    평생 함께 동고동락했던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그 그리움과 추억을 표현하는 장면들

    그저 사느라고 바빴던 그때 그 시절

    삶을 살아내느라 그렇게 배우고 싶어 하던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던 할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어떻게 해서든 할머니를 느껴보려는 할아버지의 선택

https://youtu.be/jspDau3IYdE?feature=shared


내가 만약 할아버지의 상황이라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워할까?

물론 할머니의 밥상! 이 제일 현실적인 대답일 테지만, 그리고 또?...

상대방이 행복해하던 느낌의 순간들-

너무나 좋아하던 음식, 좋아하던 노래. 지친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껄껄 웃으며 날려버리려는 모습들이 아닐까.

꿈이 있었던 파릇파릇한 10대가 그녀에게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소녀의 기도! 좋아요! 그 곡으로 가죠!"

"네~ 선생님~~~ 하하 호호~" 


추억을 돌이키며 글을 써 내려가는 내 안에 향기처럼 그윽이 퍼지는 기분 좋은 그녀의 목소리 

 '..선생님~~~ 하하 호호'


그들이 삶을 마주하는 태도

이순재 선생님과의 레슨시간은 피아노를 가르쳐 드리는 것에서 나아가 특별한 인생수업 시간이었다.

한 번 오시면 30분쯤 레슨하고 두 시간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생의 현인과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은 기다림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오실 선생님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에 응답하시 듯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물론, '소녀의 기도'는 그 유명한 도입부부터 난관이었다.

양손을 옥타브로 벌리고 붓점 리듬을 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 하지 않았다.

단선율로 한 손가락씩 양손 똑같이 맞추어 치는 일은 소근육을 사용해야 하다 보니 더욱 힘들 듯했다.

그래서 똑같은 손 넓이로 양손을 벌린 채 리듬대로만 쾅쾅 내려치는 것이 수월할 듯해서 선택 한 옥타브 연주였다.

그러나 연세가 있기에 뻗뻗해진 손가락 근육의 스트레칭은 여든이 훌쩍 넘은 그에게 보통 힘든 주법이 아니었다.

극 중 할아버지의 역할비중이 작지 않았고, 피아노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연주회까지 치루는 장면들을 통해 감동을 전달해야 하는 나름 큰 씬인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혹시 완성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무조건 대역은 준비되어야 했다.

짜인 큐시트대로 진행하는 데 있어서  음악과 모션이 맞지 않는 상황은 최악이기에 젤 먼저 잘 맞는 대역을 구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가 가능한 연세 80세 정도 되시는 할아버지가 계실까? 

계신다 해도 건강이 좋지 않으시면 불가능할 테고.. 치실 수 있다고 해도 과연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곡을 연습하고 암기하실 수 있으실까...


수소문을 해서 연세가 있으신 교수님들을 알아봤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시거나 

출연을 거부하시거나.. 그야말로 그 어떤 대역을 구할 때보다 난관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어느 날,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같이 소리를 지르는 날이 올 줄이야

"찾았다!!!"


피아노를 치신 지 얼마 되시지 않은 분이었고 찬송가 반주 정도 하신다고 했다.

'딱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되지!'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만나러 올라오시는 과정부터 만만 챦았다.

연세가 있으시고 거주하시는 곳도 레슨장소와 촬영장소에서 너무 멀다 보니 번번이 아드님이 시간을 특별히 내서 모시고 와 주셔야 했다.

그런 물리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허 진 선생님의 의지는 그 어느 젊은 사람들보다 굳건하셨고 그 과정을 기쁨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뵈며 절로 숙연해졌다.

허 진 선생님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내게 이렇게 치는 것이 맞냐고 , 이렇게 연습하고 있다고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셨고, 이순재 선생님 또한 레슨시간을 항상 칼같이 지키시는 것은 물론, 성실함과 진지함으로, 될 때까지 연습을 반복하셨다.

이순재 선생님과 허진 선생님은 그 어떤 젊은 배우, 대역보다도 열심히 연습에 임하셨고 더디긴 하지만 그 성실함으로 '소녀의 기도'라는 음악과 연주연기가 완성이 되어 갔다.


그분들이 삶에 임하는 자세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몇십 년 뒤 나에게도 똑같이 찾아오게 될 그 시간, 

삶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성찰하게 해 주었던 그들과 함께한 추억

내가 해 드린 레슨보다도 몇 곱절 주신 것이 많았던 카이로스의 시간들


오늘도 나는 그들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며 삶의 조각들을 맞춰 나가려 한다.


https://youtu.be/3SiuiqlYRnU?feature=shared

             허진 선생님의 유튜브영상-그는 결국 방송 종료 후 곡을 완성해서 실제 연주회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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