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은, 아파트
아파트에 살아보는 건 내 일생의 소원이었다.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엔 2층집 이상만 되어도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뒷집 아이, 뒤에 뒷집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형제자매처럼 가깝게 어울려 논두렁과 도랑을 건너 국민학교를 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논에서 새참 먹는 할머니들이 시루떡이며 국시며 먹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얻어먹기도 했고, 친구와 얼토당토아니한 말다툼으로 토라져도 질퍽한 논두렁 사이에 낮은 둑을 아슬아슬하게 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도와주며 넘어지고 웃어넘기기도 했던, 서태지의 데뷔로 가요계의 지각이 흔들렸던 그 90년대 초반에 나는 작은 도시의 구석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사춘기를 보내던 시기엔 높은 콘크리트 건물에 사는, 일명 ‘시내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꽤 편하게 살아간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나는 종종 아파트를 꿈꾸었다. 외관이 깨끗하고 친구들과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터가 한두 군데 형성되어 있으며 멀리 나가지 않아도 슈퍼마켓과 정육점 하나씩은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만 가르치는 학원도 늘어났다. 그때 내가 부러워한 것은 우리 집 내부나 외관과는 다른 모습보다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그들의 경제적,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례가 없는 여름 태풍이 왔던 21세기의 첫 해, 재수 중이었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의 5층에 사는 친척 할머니 댁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다. 할머니의 외사촌 벌 되는 친척 할머니는 곧 지역 중심 저수지가 범람하여 댐이 무너질 것 같으니 일단 현재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너편 중학교로 피신하라는 경비원의 안내 방송을 듣고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져 귀중품을 꺼냈다. 그리고 이불 몇 가지를 바리바리 보자기에 싸서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갑세다! 뭐하고 이쏘? 오봉댐이 무너지기 직전인데!
집 앞에 전봇대와 도로가 반으로 갈라진 걸 두 눈으로 보고서도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버지가 무너지기는 개뿔, 하고 구시렁대자 친척 할머니께서 호통을 치며 아버지를 앞장세웠다. 그렇게 자신 있는 놈이 여기까지는 왜 쳐들어왔느냐고. 우리는 열린 맨홀을 조심하면서 물길을 헤쳤다. 그러던 중에 만난 약국 아주머니가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안타까워했지만 곧 20층짜리 성 안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1층만 되어도 물이 닥쳐오지 않을 것처럼 안전해 보였다.
우리는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일렬로 나아갔다. 누군가 삐끗해서 소리를 치면 모두가 놀라 서로 다독거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맨 앞에서 방향을 잡던 아버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3일 내내 미친 듯이 퍼부었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자정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뿌듯해했다. 나는 여기저기 금이 간 장미아파트 후문에 담처럼 둘러져있는 무너진 가드 레일 위로 올라서서 위태롭게, 위태로운 동네를 둘러보았다. 예쁜 외국여자 아이 이름의 태풍이 휩쓸고 간 우리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장미아파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3분의 1쯤 물에 잠겨 울상을 짓고 있었다.
대학을 가고, 제대를 하고, 취업을 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고향 마을과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는 수많은 아파트들이 생겨났다. 신문과 인터넷 창을 열기만 하면 분양 광고가 수두룩했다. 친구나 지인들의 신혼집에 초대를 받을 때면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구석자리 어디쯤이라도 아파트 혹은 아파트를 조금 흉내 낸 신축 빌라들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면 자연스레 이 정도 집에서는 시작을 하겠거니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15년이 흘렀지만 새로 지어진 많은 아파트 중에 나의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는 여전히 없었다. 설마 주택 양식까지 대물림 되는 것은 아닌지, 주택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면역력이 있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