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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Feb 05. 2024

기억해, 인생에는 심증뿐이야

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l, 2024)




1. 리듬


  <추락의 해부(2024)>는 어쨌든 스릴러의 외피를 쓴 영화이다. 이러한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일 텐데, <추락의 해부(2024)>는 치밀하고 다양한 여러 연출적 구성을 통해 스릴러적 분위기와 리듬을 탁월하게 조율해 낸다. 스크린이 밝아오기 전 들리는 산드라의 헛기침 소리부터, 곧이어 노골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P.I.M.P의 음악, 산드라와 인물들의 묘한 관계성, 다니엘의 피아노 연주, 영상으로 재현된 녹취록 장면, 조금 과하게 해석하여 주인공 가족의 이미지에 동물성을 더하는 대형견까지. (강아지 스눕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강아지들보다 더욱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영화 내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심지어 스눕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시퀀스도 있다.) 완벽하게 조정되고 연출된 리듬은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감상하도록 해 주며, 나아가 외적으로 훌륭한 만듦새를 가진 영화라는 인상을 주었다. 



2. 촘촘함


 그렇다면 영화 내적으로는 어떨까. <추락의 해부(2024)>에는 이른바 수많은 '떡밥'들이 등장한다. 그렇잖아도 법정 싸움을 다루고 있어 대사량도 많은데, 관객들은 정신없이 영화의 떡밥들을 좇아야 한다. 이 떡밥들을 하나씩 분해하여 늘어놓는 일도 어떤 면에서는 흥미롭고 의미가 있겠지만 이 글에 '추락의 해부 해석'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난잡하지 않게 여러 주제들을 인간이라는 테마 근처로 잘 배열해 놓은 쥐스틴 트리에의 솜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3. 동일성


 앞서 적었듯 <추락의 해부(2024)>는 부정할 수 없는 법정 드라마이기에 영화 속에서 다루는 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마르쥬의 목소리를 빌려 '법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평등한가? 21세기의 법이 부르짖는 평등이란 곧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단 한 개체도 다른 개체와 같지 않다. <추락의 해부(2024)>는 인간 잣대의 동일성을 거부하는 영화이다. 

 

 법정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그리고 법이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산드라를 판단하고, 그 과정에서 산드라의 사적인 맥락과 역사는 고려되지 않는다. 산드라가 양성애자라는 사실, 외도를 했다는 사실, 고분고분한 아내와 다정한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개별적으로는 사실에 불과하지만 그 사실들은 결정적으로 산드라가 죄인이라고 가리키는 근거가 될 뿐이다. 



4. 가능성


  이어서, 그렇기에 현실은 곧 가능성과 경향성의 세계이다. "나는 당신을 판단하지 않아." 뱅상이 산드레에게 건넨 말이다. 이는 대면의 진심 어린 인간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문장이고, 그렇지 않은 관계라면 언제나 판단이 개입한다. 한정된 증거들로 한 인간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을 그리는 법정물이라는 틀을 이용해 <추락의 해부(2024)>는 결코 판단될 수 없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회색지대를 다룬다. 허구 역시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듯, 현실 또한 세계의 시스템과 대다수의 동의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허구와 진실은 같은 '가능성의 세계'이다. 현실-허구의 언급이 초반에 자주 등장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5. 불확실성 속에서 결정하기


 마지막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조명이 집중되었던 다니엘의 시선을 살피며 글을 종결하고자 한다. 다니엘은 아마 이 영화 속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이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런 다니엘에게 마르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를 결정해야 . 결정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물론 실존의 문제이다. 인생은 언제나 심증뿐,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소년은 앞으로 이 진리를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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