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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Feb 03. 2024

진흙발로도 우리는 낙원에 갈 수 있다고

괴물(MONSTER, 2023)



0. 영화보다 앞에 왔을 이름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라는 감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특히 각본을 겸했던 작품일수록) 어떤 위화감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이라는 이름표 때문일까, 유독 그의 영화에서는 캐릭터와 카메라의 거리감이 미묘했다. 선을 넘었다고 확실히 느낀 작품은 <아무도 모른다(2004)>였다. 이와 관련해, 나는 작년(2023년) 한 일본영화 강의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불행을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그의 영화에 대해 코멘트했고 '그건 아니다'라는 교수님의 답변을 들었다. '경향이 있는 것 같다'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나도 도무지 그의 세계를, 혹은 그의 메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단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2023)>을 통해 그의 메세지와 충돌했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감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듯하다. 


 물론 이는, <괴물(2023)>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각본이 아니라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논의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고레에다의 영화가 아니라 사카모토의 영화라고 투덜거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각본가를 기용하여 본인의 영화적 세계관을 훌륭하게 확장한 결과는 한 작품의 총괄 감독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또한 영화 <괴물(2023)>을 논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이름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음악을 담당한 사카모토 류이치와 여러 훌륭한 배우들, 제몫을 다해 주셨을 제작진들 역시 이 아름다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1. '괴물 찾기'라는 맥거핀


  제목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를 보고 '누가 괴물인가?', 혹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이 바로 괴물입니다', 뭐 이런 식의 그럴 듯한 한 문장짜리 리뷰를 남기는 일은 간편하리라. 어쨌든 그 간편함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누가 괴물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괴물(2023)>은 기본적으로 장르영화가 아니고, 따라서 '괴물 찾기 게임'을 하는 영화가 아니다. 더군다나 여러 인물들의 시각으로 동일한 시점을 변주해 보여주는 플롯의 형태는 문자 그대로 구조일 뿐이다. 영화 내내 흐르는 '괴물 찾기 게임'의 테마곡('괴물은 누구?')은 영화 속 인물 내에 괴물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종의 맥거핀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영화 <괴물(2023)>의 본질적인 시도는 이 세계에서, 우리 사이에서 누가 괴물인지 단정짓고 선을 긋는 행위와는 정반대로 '누구도 누구에게 감히 괴물이라 부를 수 없어'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했다. '괴물 찾기'의 방식으로 분석해 보자면, 미나토( 역)는 반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반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리고 동성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좋아하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여긴다. 요리( 역)는 모종의 이유로 아버지에게 '돼지 뇌를 이식받은 아이' 취급을 받는다. 이 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괴물성을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괴물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른들도 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의 선생님들과 요리를 문제아 취급하며 학대하는 요리의 아버지가 그 예이다. 영화 <괴물(2023)> 안에서, 우리는 이 '괴물의 선'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호리 선생은 괴물이 아닌가? 동성을 좋아한다는 고민을 가진 아들에게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하는 어머니 사오리는? 


 




2. 괴물성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적 시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시작했다. 그는 주로 학교와 그곳에 속했거나 속하지 않은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소외된 마이너리티들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히스토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알려 주는데, 그의 관심사가 소외된 마이너리티들의 삶이라는 점과 극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느 정도 다큐멘터리적일 수 있다는 이라는 조심스러운 분석이 그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하여 서술하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적 태도'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방법, 윤리에 대한 여러 글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견지하는 제작 태도를 '고레에다 히로카즈적 다큐멘터리적 시선'이라 칭하고자 한다. 서두에 서술했듯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사회 비판적 영화들은, 특히 그가 각본을 겸하고 있는 작품일수록 더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괴물(2023)>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 오랜 과제는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와의 협업으로 해결된 듯해 보인다. 그리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정적으로 획득, 선언한 '다큐멘터리적 시선'은 결코 대상을 분해하거나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집중하는 유연하게 진실된 태도로 정리될 수 있다. 





3. 재난 앞의 어린아이


  다큐멘터리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괴물(2023)>은 분명한 극영화이다. 캐릭터들과 서사는 어떤 의도를 함의하고 구축 및 설계되었고, 연출되었다. <괴물(2023)>의 인물들은 모두 공평하게 눈에 띄는 편이고 영화의 메세지라 할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괴물성의 보편성'에 있을 테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은 물론 미나토이다. 그렇다면 주인공 미나토의 캐릭터와 서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일까. 같은 반 남학생 요리를 상대로 막 첫사랑을 시작한 미나토는 혼란스럽다.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진다. 미나토를 비롯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미나토가 돼지 뇌를 이식받아 어떤 병이 있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요리를 좋아해서인지, 따돌림당하는 요리를 좋아해서인지, 요리가 동성이기 때문인지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감각으로서의 소외는 실재하는 그것보다 더욱 막연하게 느껴지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막연하고 모호해서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괴로움이 지속된다. 


  여기서 고레에다가 노련하게 놓치지 않은 포인트는 이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고 있다. 미나토와 요리의 아이들은 동성끼리 '러브러브'를 하는 일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학교 선생님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를 때리고 괴롭히면 당사자가 싫어하리라는 사실도 역시 안다. 미나토 역시 요리를 좋아하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놀림받을 일이라고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미나토는 요리에게 여태 사귀어 왔던 친구 이상의 호감을 느낌으로서 자신은 엄마 혹은 아빠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이 세계에서 가족이라는 보물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물론 미나토가 아이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지점들이 많지만, 가장 본질적으로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세계에서 버림받은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자신이 마치 작고 연약한 아이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기인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온 세계가 나에 대항하는 느낌, 이 근거 없는 범불안적 느낌 역시 어린아이 특유의 자기중심성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에서 누군가를 조롱하는 듯한 TV 프로그램, 엄마(사오리)와 선생(호리)의 성차별적인 발언 등으로 표현한 일련의 부당성은 현실에 실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동시에 어린아이의 예민함과 혼란스러움을 불쾌하지 않게 묘사한 고레에다의 최신작 <괴물(2023)>은, 그동안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어느 가족>, <아무도 모른다>에서 꾸준히 아이들을 조망하며 동시에 아이들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그의 특장점이 발휘된 결과이다.





4. '리셋 증후군'에 대항하다


 조금(혹은 많이) 모자란 나는 죽어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런 논의 자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개념이고, 특히 일본인들, 또는 일본의 서브컬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다. 각종 라이트노벨과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세계물', '환생물'이 유행하다 못해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지금의 세대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의 결말이 선사하는 메세지는 '리셋해야 마땅한 사람들', 즉 마이너리티, 수많은 괴물들을 끌어안는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린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함께 게임을 하다가, 화면에 '게임 오버'라는 문구가 뜨자 아이가 기뻐했다는 이야기. 아이는 '게임 오버'라는 단어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셋하고 싶다'는 것은 한 번 전원을 끄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나고 싶다는 희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는 잘못을 이 세상이 아닌 나에게로 돌리는,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절망의 표현이다.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의견을 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결하고자 할 수 있고, 그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이 실제로 세상에 의도한 대로 영향을 끼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록 부조리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은밀한 역동과 이해관계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에게 화살을 돌리는 방식으로는 결코 쉽게 세상의 부조리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는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실존하는 마이너리티와 괴물들의 문제를 조명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 첫사랑은 부정(不正), 혹은 부정(否定)


 덧붙여 <괴물(2023)>은 이런 이야기이다. 세상이 부정(不正)하다 여기고, 그래서 내가 부정(否定)하며 발현되는 어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모든 대상을 향한 첫사랑은 괴이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처음이고, 사랑일 것일 테니. 이 첫사랑은 물론 순조롭지 않다. 막연하게는 온 세상이, 구체적으로는 내가 사랑하고 의지했던 많은 사람들과 관념들이 이 사랑을 막아선다. 절망과 수치심은 한 순간에 재난처럼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폭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창 속 낙원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선언하는 이야기. <괴물(2023)>은 동시에 이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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