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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Dec 06. 2023

하염없이 살고 있는 엄숙 앞에서

위로공단 (Factory Complex, 2015)

 



 노동영화에 관해 준비하고 있는 일정이 있어 의무감으로 보게 된 영화였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위로공단>이라는 영화 제목이나 척 봐도 유쾌해 보이진 않는 포스터를 보고 큰 기대 없이 금방 해치우자는 게 처음 이 영화를 접한 나의 태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 외로 아주 빠르고 깊게 몰입할 수 있었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자주 접해 본 편은 아니라 판단하기에 모호한 감이 있지만 영화적으로도 잘 만들어졌다고 느꼈다. 


 <위로공단>은 여러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큰 줄기로 해서 흘러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기에 가장 치열했던 노동자들부터 현대의 승무원들까지, 그리고 우리나라의 노동자들부터 먼 해외의 여성들까지 자연스럽게 비추는 구성은 초반부에 받았던 느낌을 심화하며 크레딧이 나오는 순간까지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거의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수많은 사건들은 그 자체만으로 심각하고 충격적이어서 심경이 복잡해졌지만, 후반부에서 그 연속적인 스펙트럼에 '나'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은  어쨌거나 나와 일정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을 구경하는 것을 넘어서는 감정적 움직임을 주는 일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대사가 아닌 만큼 인터뷰어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거운 진정성이 배여 있어 더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나에게도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데모에서 외칠 구호를 정하자고 했을 때, '나도 나이키를 신고 싶다'고 외친 17살의 이야기나, 삼성이 헤어진 애인 같다는 말 등이. 그리고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왔을 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밥 굶고 살지 않는데도 늘 삶을 원망하니까. 치열했던 그들 삶의 순간들을 들을수록 머리 한켠에서는 무기력한 나를 포함한 현대의 많은 청년들이 대비되어 떠올랐다.  대학이 너무 가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는 한 노동자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는 굉장히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무기력을 반성해야 한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단순히 너무 반대처럼 느껴져서. 배부르고 등따신 세대의 오만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세상은 폭력을 통해, 아니면 무기력의 주입을 통해 사람들을 불합리에 순응하도록 만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개인적은 무기력은 극복하고 떨쳐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과는 별개로 노동과 삶이 곧 하나였던 그들의 치열함을 보며 내가 꾸준히 가져왔던 열등감 비슷한 게 떠오르기도 했다. 이 열등감은 부러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왜 이렇게 핑계를 필요로 하며 살아갈까, 하는 자기혐오감에 더 가까운데 전에 이런 내 마음과 비슷한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이영광의 오일장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란다

...

오일장에선 모두가 곱게, 미친 것 같다

뭘 팔고 사러 모여드는 난전에, 사는 게 대체 무언가

하는 물음 따윈 없다 살고 산다 여념이 없다

도합 십만원이 안되는 좌판들은 저승꽃들은

온종일 냉이며 쪽파 다듬고,

헐벗은 계산 속으로

기장이며 팥이며 서리태에, 아름도 모를 곡식들을 되면서도

깎아주면서도 신이 난다

흥정은 엄숙한 것이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은 것,

그것이 나의 발버둥이었지만 오일장엔 아예

발버둥이 없다 때 절은 전대와 목장갑 낀 손과

불쑥 고무장갑이 된 손에서

여념 없는 집중이 끓는다

뼈가 다 보일 듯 뼈로 지핀 듯, 고요한 불꽃이 탄다


사는 게 웬 징역인가 하는

마음 가난한 물음은 가난하다 하염없이 살고 있는 엄숙 앞에서


궁핍은 문제가 아니다 주림 모르는 야만보다는






 그래서 치열했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담은 영화를 보는 동안, 이기적이지만 그들 삶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치열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에도 빠졌던 것 같다. 어디서 듣기로는 왜 사는지 궁금해하는 게 좋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런 거창한 이유는 없고 나한테 그런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오만이라고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해서, 나도 그렇게 이유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삶의 태도가 쉽사리 바뀌진 않았고 한편으로는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내가 그만큼 절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늘 여기에 한편으로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덧붙이는 기반은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은 내 욕심과 게으름, 그리고 아주 조금으로는 인간이 꼭 그렇게 절박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존재는 아닐 거라는 철없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영화를 보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나와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떨어진 사람들인데 왜 내 마음이 아픈 건지도 문득 궁금했다. 동정해서일까? 쉬운 동정은 오히려 무례라고 많이들 말하고, 그래서 동정이나 연민 자체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품지 말아야 할 감정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연민이 그 자체로 나쁜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상대방이 남이라서 할 수 있는 동정은 어느 정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내 가족이나 친구가 고통받으면 그 당사자만큼은 아닐지라도 비슷하게 고통을 느끼고,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은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한 칼럼이 떠올랐다.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그러나 요즘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정이고, 그게 '인류애'라는 단어의 끝에 오는 마음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느끼는 감정이 완전무결하게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런 영화를 보고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은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행위 자체가 곧 이 영화를 외면하는 일과 아주 다른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비관주의와 패배주의를 말끔히 지우고 보면, 이런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또 그래서 이런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람하고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고, 세상은 일주일만에 바뀌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릿길을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자보자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 2023.12.07 기준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1,200원에 구매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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