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yss Feb 10. 2024

세계의 범위는 휴대폰 전파가 닿는 곳까지

<별의 목소리(2002)>,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020)>

* <별의 목소리(2002)>는 왓챠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020)>는 리디북스에서 감상했습니다.



  제목은 신카의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2002)>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에서 따 왔다. 이 문장이 낭만적으로 들린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직전 세대의 기계 문명을 향수 섞인 눈길로 동경하게 되었다. 각기 정확한 출현 시점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내 눈에 보이며, 내가 조작할 수 있고, 내가 만질 수 있는 기계들을 말이다. 구형 휴대폰 레플리카를 사들이고, 메카닉 애니메이션에 심취하며, LP나 CD 플레이어를 찾아보기도 했다. <별의 목소리(2002)>의 두 주인공, 미카코와 노보루가 누를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지금 내가 사용하는 최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화면이 즉각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내가 액정을 올바르게 터치했는지 다른 방법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작동 방식. 나는 사용했던 시절의 기억도 흐릿한 구형 휴대폰이 문득 그리워졌다.


  그러니까,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2002)>를 찾아본 일도 시작은 이랬다는 말이다. 우주에서 연합군으로 전투하는 소녀. 둘이 주고받는 메세지야 애틋했지만, 지구에 남아 있는 소년은 알 바 아니었다. 이 단편이 나에게 조금 더 복합적으로 다가온 것은, 김보영의 단편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 있어>를 읽은 다음이다. 우연하게도 이 두 작품은 비슷한 소재를 공유한다. 여자는 우주로 떠나가고, 남자는 지구에서(김보영의 작품의 경우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여자를 기다린다. 사전 정보라고는 전혀 없이 이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감상하게 되었고, 결국 이 SF들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는 낭만과 정서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두 남자는 우주로 떠난 두 여자를 기다린다. 어려운 물리 공식은 몰라서 쉽게 정리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우주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기에 남자들과 여자들은 공간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시간대까지 다르다. 그야말로 차원을 초월한 기다림이다. 그리고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물든다. 시간과 공간이 동전을 뒤집는 듯한 말장난의 관계에 놓여 있듯이, 기다림과 그리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꽤 그럴듯하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어쨌든 쉽게는 뛰어넘을 수 없기에 기다림과 그리움이 발생하는 것일 테니.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곧이어 애틋함을 유발한다. 지금 당장 네 곁으로 달려갈 수 없으니, 다만 너 없도록 주어진 외로운 시공간을 온전히 살아낼 것이라는 다짐은 묵묵하고 정직하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떠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의미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수고를 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구세기적 사랑 방식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편하고 신속하게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다. 대화를 하거나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오랜 시간 이동할 필요는 없다. 드넓은 너와 나 사이의 시공간 사이를 이제는 온갖 기계와 기술들이 연결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초반의 기계에 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 보자. 너와 나를 연결하는 기술은 점점 내재되고, 비가시화되고 있다. 이어폰 줄과 수화기는 사라졌다. 전달되는 메세지의 가공 정도 역시 심화된다.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경우는 목소리나 표정이 바로 전달된다. 종이에 연필로 쓰는 편지는 필체가 드러난다. 그러나 지금 '메세지'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것들은 어떤가. 액정에 떠 있는 문자들로는 상대방의 어떤 개성도 감각할 수 없다. 눈으로 읽고 뇌로 이해하고 나서야 머릿속에 상대가 그려지는 매커니즘을 따른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속에서의 편지도 이런 방식으로 전달된다. 더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기에 연락은 모두 기술화를 거친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3)> 에서 극을 이끄는 데 사용되는 모바일 메세지들을 떠올려 보라. 친절한 그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라는 AI의 단순한 음성에 왜 관객들은 매혹당하는가. 날것의 무언가가 진심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술로서 가공되는 과정을 거쳤으나 결코 변형되지 않은 무언가가.


  꼭 지구와 우주라는 공간에 각자 떨어진 사이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모두 다른 별에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결이란 이런 거리감이 극복될 수 있는 모든 관계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술과 기계는 인간 연결 방식의 일종이다. 이런 기술과 기계들은 우리들의 음성을, 메세지를 몇 번이고 가공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우리들은 포장된 메세지 속에서 언제나 본심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딱딱하고 일률적인 폰트의 문자 메세지 속에서 누군가의 감정과 상태를 바로 감각한다.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너와 내가 주고받는 메세지는 하나도 은밀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은데 어째서 우리 사이는 이토록 투명하게 느껴지는지. 아마도 인간은 기술과 함께 기술 너머의 '너'를 상상해낼 능력도 함께 개발해 온 모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해, 인생에는 심증뿐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