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아지면서 확장되는 PTA의 세계
나에게서 당신까지의 거리를 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위치와 당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디쯤, 당신은 어디쯤 속하는 걸까. 결론은 거리를 체감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계가 얼마나 광활한지 비로소 느끼게 되고, 그 세계에서 당신과 나는 어디쯤 존재하는지 가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해진다. 당신을 만나고 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하고 모호한 존재인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의 작품보다도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야기가 관계의 이야기라고 느낀다. 연결된 관계 없이는 아무도 이상하거나 독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보는 이들에게 주로 사랑으로 해석되는 것 같지만 이름이란 게 늘 그렇듯, 사실 대상과 이름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그 관계가 정말 사랑인가? 하는 물음의 답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다. 당신을 깨물어 터뜨려 버리고 싶다는 말이 정말 사랑의 속삭임인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우리-세계에서, 너-나로, 나-나로 이어지는 PTA의 시도를 '좁아지면서 확장하는 PTA의 세계'라는 부제를 통해 따라가 보았다.
데뷔작인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PT는 사랑하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비춘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는 빛과 어둠의 대비와 연결을 유독 자주 보여 준다. 영화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환상적인 실루엣 장면이 이를 잘 표현해 주는데, 아무리 세상이 환한 빛으로 가득한 곳이고 우리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해도 바로 그 차이로 인해 특별해지는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시각화해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 중인 둘을 보고 있으면 사랑(恋)과 비정상(変)이라는 한자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이 떠오르는데,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끊임없이 '비정상'이라는 테마를 상기시킨다는 이유에서 그러할 것이다. 주인공들의 정체성과도, 또 그들이 하는 사랑의 모습과도 관련이 있는 이 테마는 앞으로 PTA가 전개하는 사랑과 사람의 이야기의 시작으로 자리잡는다.
깨물어서 터뜨려 버리고 싶다는 비교적 귀여운 밀어가 있는가 하면, 독이 든 버섯으로 요리한 오믈렛을 건네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아 삼키는 관계도 있다. <팬텀 스레드>의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서로의 등을 딱 붙이고 서 있는 둘인 줄을 모르고, 너에게 나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계속해서 줄자를 들이댄다. 끊임없이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통해 너와 나의 경계와 거리는 흐려진다. PTA는 이러한 미친 사랑 방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사랑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경계가 붕괴되고 변태하는 현상 자체를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런 의미에서 PTA는 진정 '변태스러운' 감독이 아닐까.
이어서 가장 최근작인 <리코리쉬 피자>를 통해 PTA는 한 발짝 다른 걸음을 내딛는다.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분명 성장담의 골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성장이 어떤 인연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준다.
누구에게나 내가 왜 그런 애를 좋아했나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과거가 부끄러워짐은 곧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는 달라졌다는, 거리가 생겼다는 증거일 테다. 내가 나로부터 달라지는 과정 속에 다른 누군가와 보내고 겪어 온 시간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그리고 달라진 내가 마음에 든다면. 내 마음 속에만 새겨진 흑역사는 부끄럽지만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PTA는 <리코리쉬 피자>를 통해 말한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있기에 과거의 나, 과거의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