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한국에서 살면서 유럽 여행을 나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몰타에 거주하면서부터는, 스위스 같은 나라가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인들이 '최애'로 꼽는 스위스를 이 기회에 가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할 것 같아, 결국 스위스행을 결심했다.
몰타에서 만난 다른 한국 학생들이 스위스 알프스에 다녀와 감탄을 연발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 역시 그곳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항공편을 알아보던 중, 아직 가보지 못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밀라노가 스위스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밀라노도 함께 여행하고, 이어 스위스로 넘어가는 일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데, 실제로 11월의 비수기임에도 호텔 숙박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도 몇 차례 유럽을 여행하며 생긴 요령 덕분에, 물가가 비싼 지역에서는 호스텔이나 도미토리를 선택해 비용을 절약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호스텔의 장점은 단순한 가격 절감 외에도 있다. 늘 혼자 다니는 여행 일정 속에서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외국인인 내가 현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쉽지 않지만, 호스텔에서는 그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다.
여행 당일, 저가 항공사 라이언에어를 이용해 밀라노에 도착했다. 밀라노 중앙역을 기점으로 두오모 성당, 광장, 산타마리아 교회 등을 둘러보았다. 요즘은 유럽 어디를 가든 성당, 박물관, 궁전 같은 코스가 정형화되어 있어, 특별히 무료가 아닌 이상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에는 ‘호수와 산의 도시’로 유명한 꼬모(Como)를 방문했다. 기차와 크루즈를 타고 영어 가이드 투어에 참여했지만, 이번엔 다소 실망스러웠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영어 가이드는 발음이 괜찮았는데, 이탈리아의 가이드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다 보니 설명의 시작을 놓치는 바람에 이해가 쉽지 않았다.
영어 실력이 완벽하지 않은 내게는 더더욱 힘든 설명이었지만, 가이드가 내 이름을 “Kang, Kang” 하며 기억해 준 덕분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투어가 끝난 뒤 가이드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스페인어로 “Muchas gracias”라고 말했고, 우리는 이별의 악수를 나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표현에 솔직한 편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짧은 만남에서도 따뜻한 말을 덧붙이는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짧은 밀라노 일정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스위스 루체른으로 향했다. 루체른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굳이 무리하지 않기 위해 중간 숙박지로 선택했다.
숙소를 예약하다가 도미토리 형태의 전망 좋은 곳을 발견했는데, 나이 제한이 40세까지로 설정돼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예약을 취소하려 했지만, 집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리뷰에 부정적 평가만 남기지 않으면 괜찮다며 받아주었다. 결국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밀라노에서 루체른까지는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미리 꼼꼼히 준비했지만, 현지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실수는 반복됐다. 스위스 기차 앱(SBB Mobile)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Chiasso 역에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냥 ‘다음 기차 타면 되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역무원에게 물어 플랫폼 개념을 이해한 후, 다음 기차를 타고 무사히 루체른역에 도착했다. 시계는 저녁 6시를 조금 넘겼고, 초겨울이라 해는 이미 져 있었다.
구글맵을 참고해 버스를 기다렸지만, 번호가 맞지 않아 당황하고 있던 차에 친절한 스위스 여성이 길을 안내해 주어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루체른에서 머물 도미토리는 ‘Youngpackers Homestay’.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내가 사전에 연락한 여직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입실 절차와 함께 내 방, 공용 주방, 화장실 등을 안내받고 짐을 풀었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에 갔더니, 한 젊은 여성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 도착해서 어색했는데, 먼저 말을 걸어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다고 했고, 동양식 라면을 끓이고 있었는데 방법을 잘 몰라하는 것 같아 요리법을 알려주자 고맙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올해 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해서 더 반가웠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 있던 외국인 남성 두 명이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중 한 명은 미국에서, 또 다른 한 명은 애틀랜타 출신이었다. 처음엔 지명이 익숙하지 않아 다시 물었더니, 그의 발음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애틀랜타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고 하니 대화는 더 이어졌고, 서로 여행 중인 일정이나 계획 등을 공유했다. 나는 유럽에 온 지 10개월 되었고, 영어도 그 기간 동안 배웠다고 하자 모두가 칭찬을 해주었다. 예의상이라 해도 기분은 좋았다.
식사 시간이 되어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았고, 미국인 2명, 호주인 1명, 독일인 1명, 그리고 나까지 5명이 함께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원어민들끼리는 속도가 빨랐고, 내가 따라가기엔 버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해되는 부분에선 맞장구도 치며 최대한 대화에 참여했다.
점점 대화 주제가 진지해지고 속도가 빨라지자 따라가기 힘들어 방으로 돌아와 다음 날 일정을 계획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 침대에 도착하자, 숙소에서 준 티켓에 ‘게스트들끼리 대화와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을 선호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웠지만, 이미 하루를 보낸 지금, 나름 잘 해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복도에서 만난 여직원에게 "오늘은 그냥저냥 간단한 소개를 하고 잘 넘어간 것 같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자 “괜찮아요. 당신 영어 잘하고 있어요.”라며 따뜻하게 격려해 주었다.
남은 하루가 약간 걱정되기도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일 해가 뜨면, 그냥 그 해를 맞이하며 부딪혀보는 수밖에.
내일 스위스의 또 다른 명소인 루체른의 대표 명소, ‘리기 쿨룸(Rigi Kulm)’을 방문하기 위해 이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