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여운 것들>
예술영화계의 스타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가여운 것들>이 3월 6일 정식 개봉을 한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경쟁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공식 초청됐으며, 제96회 아카데미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작품들 중 최다 부문에 후보에 올랐고, 멈출 줄 모르는 수상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 외적인 쾌거와 함께 감독의 데뷔작 <송곳니>부터 전작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까지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기에 충분할 따름이다.
영화는 앨리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색을 거쳐 설정 차이가 다소 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을 관찰하며 나레이션 하는 인물이 따로 존재하고, 영화의 결말부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한 서술도 더욱 길다. 이런 차이점은 소설을 통해 확인해보길 바란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 단언컨대 <가여운 것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장 아름답고 해피엔딩인 영화다. 독창적이며 흥미롭고 담대한 이 영화를 들여다보자.
※ 이 글은 <가여운 것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
이름 모를 여인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 천재적이지만 괴짜 같은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렘 대포), 일명 '갓'에 의해 되살아난 그의 이름은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 성인 여성의 몸과 아기의 뇌가 결합된 벨라는 고드윈의 보호를 받으며 걸음마를 떼고, 단어를 배워가며 성장한다. 날이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넘쳐나는 벨라. 고윈의 조수 맥스 매캔들스(라미 유세프)와의 결혼을 앞두고 불손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과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벨라는 과연 어떤 일을 겪고 무엇을 배워나갈까?
영화는 작심하고 설정한 부분들로 가득하다. 우선 '벨라'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리고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이 영화가 빅토리아 시대를 다루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발명, 산업혁명 등으로 과학기술이 번성했던 시대이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로 표현되는 이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의 이름은 이렇듯 교집합을 형성한다. 벨라는 고드윈의 수술을 거쳐 탄생한 하나의 실험체이기도 하다. 19세기에 이르러 외과수술이 비학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극중 고드윈과 비슷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과학적 성취에 비하여 빅토리아 시대는 문화적으로는 폐쇄된 사회였다. 여성에게 꽉 조이는 옷을 입는 복식 문화가 존재했고, 여성의 성적 요구를 악마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위선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방탕한 시대였다고. 이러한 설정들을 미루어 볼 때 극중의 상황 자체가 빅토리아의 죽음이 벨라의 탄생의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후 시대적 요구를 따르는 여성에서 자신의 욕망을 탐구하는 여성으로의 재탄생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서사이기 때문이다.
먼저, 로우 앵글로 좁은 복도를 걷는 사람과 함께 흘러나오는 기괴한 음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인장과도 같은 장면이다. 벨라의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와 위태로운 음악이 만나 영화의 오프닝을 알린다. 영화 중간중간 사용되는 비네팅 광각 렌즈는 화면을 극도로 왜곡한다. 보통의 감독이었다면 시점 쇼트에서 쓸 법한 기법인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일반 카메라의 렌즈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어법을 교란하고 훼방하는 듯하다. 이처럼 <가여운 것들>은 수많은 규칙은 대체 왜 만들었을까를 탐구하는 영화다.
이런 렌즈의 사용은 제목과도 연결지어 바라볼 수 있다. 둥근 모양의 비네팅 광각 렌즈는 또 '어안렌즈'라고 하는 물고기의 눈과도 닮았다. 빅토리아가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마주쳤던 물고기의 눈과 유사하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벨라가 내려다본 죽어가는 아이들의 눈과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래서 '가여운 것들'은 물고기와 아이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진짜 더 가여운 것들은 그 공통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벨라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관계의 역전'이라는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벨라의 여정의 시작과 끝은 덩컨과의 관계의 역전을, 빅토리아로 살았을 때의 알피의 집과 벨라로 살아가는 알피의 집에서의 관계는 알피와의 관계의 역전을 보이고 있다. 이 둘은 각각 순응과 자유, 자살과 해방의 대립되는 관계와 매치된다. 또 벨라를 가르치고 규제하는 남성 캐릭터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벨라 때문에 인생과 사랑을 배운 고드윈과 빅토리아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듣는 알피의 모습을 보면 여성과 남성의 관계 또한 역전된 형태로 비추어진다. 한편, 수술의 대상이 수술한다는 특이한 관점은 고드윈의 아버지 - 고드윈 - 벨라를 둘러싸고 계승된다는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의사가 되기를 택한 벨라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벨라는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수치심이란 통제하기 위한 주입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수치심이 없다는 건 벨라에게 인간에 대한 최악의 평가가 아니다. 벨라에게 최악의 평가는 어쩌면 모험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일 것이다. 영화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런 주제의식은 벨라를 선악의 구분이 없는, 온몸으로 부딪히는 주인공을 그려냄으로써 전형적인 성장캐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코미디 영화의 근간이 되는 풍자적 태도에 동화적 화법을 결합하여 한층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창조해냈다. 영화의 미장센이나 비주얼만큼 훌륭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엠마 스톤의 경이로운 연기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가여운 것들>은 일종의 '인간 실험' 이야기다. 인간에 대한 실존주의적 논의를 하기 위한 세팅으로 받아들인다면, 영화에 보다 깊이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가여운 것들>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수치심이 전혀 없는 한 여성의 실험이자 모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