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찾다가 울 일인가요
기상 악화와 이민가방이 제게 가져왔던, 죽음의 문턱 앞에서 유턴한 미국 입국기. 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발단: 누구나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가 있다>
미국 유학이 결정되고, 제가 사생결단으로 미뤘던 일은 이삿짐을 싸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자기가 맥시멀리스트인지 자기만 모르는 사람 1'을 맡고 있던 저는 짐 싸는 일이 보통일이 아닐 것이라는 걸 직감으로는 알고 있었는지 이삿짐 싸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떠나기 하루 전에야 겨우 이민가방 지퍼에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대한민국을 전부 옮길 생각으로 짐을 싸고보니 총 78kg에 달하더군요.
그렇게 빵빵한 이민가방 2개+기내용 캐리어 1개+기내용 휴대가방 1개 총 4개 짐을 들고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참고로 이민가방은 무게제한을 한참 초과해서 오버차지 요금 20만 원을 일단 때리고 시작한 것이었답니다.
그나마 인천공항까지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제가 육수에 젖은 시골쥐가 되지 않도록 짐을 함께 옮겨준 덕분에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독립의 세계로 넘어갈 문턱 앞에서 그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만 것입니다.
<전개: 뉴스 왈 "태풍이 부메랑처럼 튕겨 나와 한반도에 상륙할 예정입니다">
떠나기 이틀 전인가부터 태풍 카눈의 행적이 수상했습니다. 한반도 근처에도 오지 않을 것이라던 카눈이 냅다 맹랑하게 한반도 중심을 관통한다는 것이었는데요, 하필 제 출국 날짜 하루이틀 간으로 태풍의 눈이 한반도를 정문일침해버린다고 하더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1시간 연착 정도로 태풍과 원만한 합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14시간짜리 장거리 비행인데 거기에 1시간 더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 생각했어요. 근데 생각만 할 때와 직접 겪어 보는 건 다르더군요.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기 1초 전에 극적으로 엉덩이를 비행기 좌석에서 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전공연관성 때문인지 F1비자 때문인지 아님 그냥 불쌍해보였던 때문인지 비상구 좌석에 앉을 1일 위기탈출 넘버원 알바로 선정될 수 있었는데, 덕분에 지옥의 가운데 자리는 면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 전개면 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위기: 경유지에서 짐을 찾아 다시 부치세요>
저는 당연히 제 몸뚱이는 경유를 하더라도 제 짐은 직통으로 배송될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포근한 요람 같은 착각에서 깨어난 것은 떠나기 하루 전. 왠지 모를 불행한 예감이 짜르르 오는 바람에 대한항공 홈페이지를 급하게 찾아보니, 한-미 국제선에서 미-미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경우 짐을 제가 찾아서 다시 연결선으로 보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까이거 그냥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그간 오랜 석사 및 은둔 생활로 인해 제 체력은 바닥을 찍고 땅굴을 판 상태였고 저에게 이민가방 옮기기는 과히 격정적인 운동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짐은 저를 헤아려 줄 새도 없이 제 몸무게 두 배 되는 무게를 찍어버린 지 오래였고, 15시간짜리 비행을 어찌어찌 마친 저는 그나마 기내식으로 축적했던 에너지 전부를 경유지에서 짐 찾는 데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연결선만 타면 다 끝이니까 다 왔네 하시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참고로 저는 뉴욕에서 경유했는데, 네이버에 뉴욕을 치면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여행자들의 로망과 기대를 120% 충족시켜 주는 여행의 천국'이라고 나오는 거 아시나요?
<절정: 장인은 장비를 탓한다>
뉴욕은 여행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입국 및 출국심사를 기다리는 줄은 끝이 없었고 경유지에서 3시간 정도면 떡을 치고도 남겠다는 생각은 고이 접어 넣어두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출국 심사를 시작합니다. 당신이 가진 장비를 모두 꺼내세요.
한국에서 출국 심사를 할 때는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스마트폰 따위의 것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두어도 꺼내라고 하지 않았는데, 천조국은 달랐습니다. 노트북, 아이패드 요런 것들을 겹치지 않게 바구니에 다 꺼내서 담으라고 하더군요. 숨어있는 마피아를 잡기 위해선 선량한 시민이 자기 증명을 해 보여야 하는 것이겠죠.
저는 선량한 시민이었다만 그들은 알 바가 없으니 저는 전국 장비자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장비빨을 오지게도 세웠던 원생은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그저 속절없이 바구니에 쓸어 넣었고, 비행기 이륙 시간이 다가와 초조해하던 제 뒤의 여행객들은 보부상 같은 저를 짜게 식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하물 해체 및 합체 쇼를 겨우 마무리하고 게이트를 찾아갔을 땐 또 다른 장관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인천에 이어 뉴욕에도 비가 주룩주룩 내려 연착파티가 열려 있었고, 오만가지 지역으로 떠날 여행객들은 계속해서 바뀌는 게이트와 이륙 시간에 혼란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뉴욕의 JFK 공항을 도떼기시장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짐 찾고 부치는 데 다 쓴 체력을 회복할 새도 없이 깨 벗겨진 채 출국심사를 끝내고, 뭐라도 먹을 정신도 없이 계속 바뀌는 비행기 스케줄을 확인하다가 그저 연결선에 몸을 던져 넣고 기절하였습니다.
<결말: 우버 기사와 친구 먹다>
이제 짐 찾는 데에는 도사가 된 나. 연결선에서 기절한 덕분에 피를 채울 수 있었던 저는 마지막 짐 찾기는 너무나 스무스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고, 처음 불러본 우버와도 성공적으로 접선할 수 있었습니다.
건실한 청년이었던 우버 기사님은 육수에 젖은 시골쥐가 딱했는지 이민가방을 두말없이 친절하게 실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는 한국어를 영어보다 잘하는 한국 7년 거주 경력의 네팔 청년이었습니다.
제 아파트로 가는 내내 저는 네팔 청년과 끊임없이 한국어로 대화했고(?) 미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더 많이 쓴 저는 그 네팔 청년에게 팁을 너무도 많이 줘버림으로써 24시간 동안 이어졌던 미국행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네팔 청년과는 결국 거의 반강제적으로 친구를 먹어 다음 날 미국 대형마트인 Target에 같이 쇼핑을 가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첫날을 마무리하며, 돌이켜보니 웃기게 쓰면 웃기게 쓰인 대로 기억하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해가 진지도 모르고 장 보다가 품에 두루마리 휴지를 안고 울면서 돌아왔던 여전히 끝나지 않은 첫째 날의 재앙과, 천하무적 학생증을 발급받았던 둘째 날 기억을 뇌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