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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Jan 15. 2024

햇살은 차가울 때도 있다

「이터널 선샤인」, 2004

 햇살은 꺼지기 마련이다

한국 재개봉 당시 포스터

「이터널 선샤인」, 2004

・ 미셸 공드리 감독 /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주연


  

당신이 원하던 시간대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기회에는 잘해보시길 바랍니다.



  SF로 사랑이란 주제를 다룬 영화들 중 「인터스텔라」이전엔 「이터널 선샤인」이 있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지구의 운명 같은 장대한 소재는 아닙니다만, 본 작품 역시 ”기억 삭제“라는 공상과학적 요소를 활용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운 남녀의 애절한 이야기를 그려내었는데요.


  단순히 플롯에 기댈 뿐 아니라 관객의 이해를 돕는 세심한 연출과 관찰 요소가 되는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제작자의 뛰어난 상상력이 가미된 영상 등 만남과 이별을 겪은 횟수가 늘어날수록 매번 다르게 보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짐 캐리가 분한 리들러(왼)와 조엘(우)

  또한 「브루스 올마이티」, 「마스크」 등 해외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코미디 전문 배우로 더 유명한 짐 캐리가 맡은 진지한 정극 연기 역시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지워낼 만큼 훌륭한데요.


  그의 전작에서 공고화된 시끄럽고 과장된 이미지와 달리 작 중 대사처럼 '비어있고 재미없지만 착한' 남자를 연기해 내 동일인물이 맞냐는 평가 역시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I

줄거리



어제 뭐 했더라?

  찌뿌둥합니다. 창문에 푸르게 묻는 이른 아침에 숙취처럼 늘어지는 몸. 조엘은 지난밤에는 뭘 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날이 한두 번이던가요.


  코트 곳곳을 비집고 차갑게 들이치는 겨울바람에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합니다. 하필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지만 조엘은 누군가와 아침 인사를 하지도, 저녁 약속을 위한 면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밸런타인데이는 사실 카드회사가 사람들 기분을 잡치게 하려고 만든 날이다


  지하철역에는 꽃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고, 조엘처럼 사뭇 어두운 표정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의 유래에 대해 떠드는 대화를 엿듣는 것쯤으로 그칠 날.


  분명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으나 반대편에서 곧 출발하는 기차의 행선지인 몬톡이라는 말을 듣자 조엘은 뭔가에 홀린 듯 충동적으로 통근 기차가 아닌 바닷바람이 매서운 몬톡으로 향합니다.


딱히 얻는 건 없는 듯싶었는데

  시끄러운 파도만 덮쳐오는 바다에 온 별 이유도 없이 온 조엘. 그는 그저 더 차가울 뿐인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걸으며 직장 동료에게 전화해 변명을 하고 거추장스러울 뿐인 가방을 들고 다니는데요.


  그러다 별 의미 없던 일탈에 불과했던 하루 중 조엘은 클레멘타인이란 여자를 만납니다. 바다처럼 푸른색으로 염색된 머리만큼 그녀는 첫 만남부터 독특한 개성을 풍기며 조엘과 안면을 트고,


'영화'같은 첫 만남

  흐지부지 끊어질 것 같던 일면식은 왜인지 절묘하게 엮입니다. 아침에 충동적으로 몬톡행 기차를 탔던 것처럼 조엘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클레멘타인에게 호감을 느끼며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클레멘타인과 시간을 보내는데요.


  그러던 중 누군가가 다가와 걱정하듯 불안한 듯 묻습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아는 듯한 남자. 하지만 조엘에게는 초면인데요.


뭐 도와드려요? 여긴 왜 왔어요?






  어느새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오래된 연인인 듯 보입니다. (사실은 조엘이 기억을 지우기 전 과거의 상황이지만요) 달라진 것은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깔뿐.


  과거인지 현재인지 가늠할 수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크게 다퉜다는 것이고, 클레멘타인에게 사과하러 찾아갔던 조엘은 그녀로부터 큰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데요.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벌써 다른 남자가 생긴 클레멘타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조엘은 친구들에게 믿을 수 없다며 하소연을 합니다



말도 안 돼. 걔 또 충동적으로 그러는 거야.
클렘(애칭)이 좀 충동적이긴 하지.



  결국 조엘의 절망을 보다 못한 친구는 서랍장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줍니다. 사실 시한부였을까. 아니면 이별 편지일까. 그러나 카드에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이상한 말이 쓰여 있었는데요.


클레멘타인 크루신스키(은)는 조엘 배리시(을)를 기억에서 삭제하였습니다. 그녀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절대 언급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단순히 남에 그치지 않고 알고 있던 적이 없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평행선처럼 부딪힐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무너져내리는 조엘.


  조엘은 카드에 쓰여 있던 “라쿠나 사”를 찾아갑니다. 하워드 박사가 운영하는 이곳은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특정한 기억을 지워주는 업체였는데요.


  나만 힘들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조엘은 결국 밸런타인데이 전날, 자신의 연인이 그랬던 것처럼 클레멘타인 크루신스키를 기억에서 지우기로 결정합니다.



조엘_ 뇌 손상의 위험은 없나요?

하워드_ 이 시술(기억 삭제) 자체가 일종의 뇌 손상을 유발하긴 합니다만, 과음한 날 숙취 정도 수준이에요.



  마침내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울 준비를 마친 조엘. 자는 동안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와 기억을 지워주면, 다음 날 아침엔 과음한 날의 숙취를 느끼며 삶의 큰 부분을 떼어낸 채 일어나겠지요.


  이내 조엘의 침실에 라쿠나 사 직원들이 찾아옵니다. 조엘은 취침하듯 누운 채 기억 삭제를 진행하며 작품의 서사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II

기억을 걷는 시간



  시간을 다룬 「어바웃 타임」이 '세이브 • 로드'라면, 기억을 다룬 「이터널 선샤인」은 '초기화'에 가깝습니다. 메모리 처리 용량이 너무 많아 컴퓨터가 느려지면 재시동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에서 인간의 기억은 그러한 처리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바삐 살아가는 날들에 흘려보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별 이유 없이 머릿속에 뾰족하게 자리 잡은 기억들도 있는데요.


  시간이 흐르며 잊히는 것은 내가 그 기억 속에서 아팠던 이유뿐이기도 합니다.


조엘의 꿈속

  서로의 매력에 반해 관계를 시작하고 지속하며 정신적인 안정과 행복감을 얻었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여느 장수 커플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더 이상 손으로 주물러 모양을 잡을 필요 없는 두 사람의 관계.


  언제고 다시 방향을 틀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언제나 찰흙 같은 인간관계는 가만히 두다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맙니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기억에서 지운 것을 안 조엘은 약간은 복수심으로, 약간은 해방감으로 그녀를 따라 자신도 기억을 지우길 선택합니다. 다만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을 통해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탐험하게 되는데요.


  일종의 지도와도 같은 그녀와의 삶. 그 안에서 조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됩니다.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다 가고 남았다고 착각했던 조엘은 자신의 기억 속 존재하는 클레멘타인이 삭제되지 않도록 도망칩니다.


  의도적으로 조엘이 관계가 파탄 났던 기억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던 기억으로 이동하도록 배치된 서사의 역순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간 갖고 있던 질문들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봐.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해?


  결국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삭제되는 것을 막지 못한 채 작품의 첫 번째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우연인지 서로 기억이 지워진 채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되고,


  서로를 사랑했다는 감각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는지 순식간에 이끌려 시간을 보냅니다. 그 잠시의 평화도 오래가진 않았지만요.





III

딱 죽을 만큼만 사랑해요



햇살은 차가울 때도 있다

  모종의 사건으로 라쿠나 사의 직원인 메리는 이 '기억 삭제'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시술을 받았던 이들에게 무언가를 보냅니다. 바로 시술을 시작하기 전 고객들이 각자 지우고 싶은 기억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녹음한 테이프였는데요.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각자 기억을 지우기 전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여자가, 날 재미없고 공허하다고 말하며 질려버린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날 문란하고 감정 조절 장애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큰 혼란에 빠져버린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신 보지 않을 줄 알았으나, 나와 만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어쩔 생각이냐는 클레멘타인의 경고에 조엘은 대답합니다.


그러죠, 뭐.


  사랑은 언제나 이해보다 앞에 있는 가치입니다. '딱 죽을 만큼만 사랑한다'는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문장처럼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 우리의 위태로운 관계를 해결하는 말은 짧고도 따뜻한 한마디였습니다. 무심한 듯, "그러죠 뭐."


단순했던 해결책

  「이터널 선샤인」은 관계를 지탱하는 큰 요소인 기억을 활용해 사랑의 필연적인 결핍을 이야기합니다. 공감, 이해, 납득보다는 그냥 같이 있었던 시간들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나요.


  「인터스텔라」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사랑을 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죽을 만큼"이라는 말처럼 너무 두려워 발 디딜 수 없는 곳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사랑은 시궁창 같은 거야. 자기 똥을 먹는 것처럼.

-  영화 「왓 이프 (2013)」  -



    결국 시술이 거의 완료되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기억으로 돌아간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클레멘타인의 존재가 지워지기 전 조엘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이해가 가면 남는 게 오해이며 사랑을 시작하면 저절로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냥 음미하세요.


https://youtu.be/X4D4ns6_mS8_

출처 : Warguss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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