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삭 Jan 08. 2024

썰렁개그의 단점

「조커」, 2019

그게 인생이야.


조커 포스터

「조커」, 2019

・ 토드 필립스 감독 / 호아킨 피닉스 주연


  왈가왈부가 필요 없는, 최근에는 넷플릭스에 공개된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입니다. 코믹스 원작이라는 양날의 검을 갖고 있음에도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챙겨, 몇 년간 물장구만 치던 DC 코믹스 영화들에게 큰 풀을 선사한 명작입니다.


  캐릭터의 전사와 감정선을 완전히 재창조해 코믹스 팬들에조차 납득시킨 각본과 연출. 그리고 히스 레저의 조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끝판왕을 찍은 호아킨의 연기까지.  


  「조커」는 특정 장면들이 다소 수위가 높고 일부 평론가들은 작품의 주제에 관해 사회적 여파를 우려했으나 코믹스 원작 영화 최초로 권위적인 영화제의 정상을 차지할 만한 작품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필자는 이 작품에 크나큰 사회적 틀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후술 할 조커의 정체성은 공감, 이해와 관심이 요구되는 대단한 비극이 아니라 형편없는 코미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개 같은 코미디였어.





I

썰렁개그

줄거리



웃기지? 웃기지?

  꼭 사람들 중에는 불쾌한 농담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관계를 겪다 보면 친구의 가정사를 가지고 동의 없이 농담의 소재로 쓴다거나, 누군가의 밝히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를 꺼내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요.


  분위기 환기를 위한 심심한 유머가 아니라, 웃음과 관심을 노린 이기적인 장난은 언제나 그 공간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곤 합니다.


  아서를 불러다 다른 직원들이 당신을 불편해한다고 말하는 상사의 대사처럼 아서와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 어딘가 불편해질 것만 같습니다. 절뚝거리는 걸음새와 중증의 정신병, 비정상적으로 깡마른 몸과 그의 인생에 지독하게 엮여있는 가난까지.


  존재 자체로 타인을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아서는 심지어 남을 웃기게 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때문에 행사 관련 업체에서 광대로 일을 하는데요.


  자신의 인생에 걸친 악조건들에도 아서는 아픈 어머니를 홀로 간병하고, 어렵지만 코미디언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힘겹게나마 꾸려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무관심이었는데요. 내가 슬프건 웃건 다치건 건강하건 이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는. 동료였던 랜들에게 누명을 써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별 이유 없이 양아치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세상은 유명 인사의 말 한마디에 더 많은 확성기를 가져다 댑니다.


광대와 조커는 분명 다르다

  어머니는 망상환자에 아서는 입양아. 그의 정신병과 신체적인 결함은 어릴 적 학대로부터 생긴 흔적. 아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진실들을 깨닫고는 삶에 대해 희대의 명대사를 칩니다.


 여태껏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개 같은 코미디였어.



  비극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받습니다. 정말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함에서부터 단순히 자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요. 후원의 손길이 닿기도 하고 비극을 이겨내려는 누군가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오히려 동기부여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서의 삶은 그렇지 않죠?


  실소를 흘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불편한, 형편없는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이해도 공감도 관심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농담 같을 정도로 불행한 삶임에도. 그리고 그 농담을 평생 진실이라고 믿어온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이때의 설명 못할 불편함처럼

  아서의 삶 역시 누군가 이해하려고 하거나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겉모습과 조건들을 보고 그냥 그런 놈이라고 생각해 버리죠. 조커는 이 시점에서 나한테 별 이유 없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 따지고 싶어 합니다. 후반부 머레이 쇼 스튜디오에서 말하길,





II 

광대와 조커


잘난 당신들은 항상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려고 하지.
뭐가 재밌고 재미없는 농담인지 정해놓는 것처럼.


  아서의 삶이 옳다 그르다를 누가 평가할 수 있나요? 그의 한 부분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짓고 병원에 넣어 약을 먹일 이유가 있는가요.


  범죄의 마지노선을 누가 정하며, 우리는 왜 남들이 슬퍼하는 무언가에 대고 실실 웃으면 안 되는 걸까요? 자신의 의지대로 제어되지 않는 웃음을 내가 왜 참아야 하나요.


  이러한 부조리는 아서의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이란 은유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조커로 변신한 이후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이 웃기다고 생각하면 웃는 모습. 초반과 크게 대비되는 포인트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아서와 조커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살아오던 아서 플렉의 삶에는 어떠한 도움도, 관심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특정한 누군가의 평화로운 레이더에 들어오는 순간 보이지 않던 손이 나타나 손발을 묶고 배에 주먹을 꽂죠.


  이러한 부조리를 깨달은 아서는 광대가 되길 그만둡니다. "나 재밌지?"라고 반응을 기다리며 재롱을 떠는 광대가 아니라, "농담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라고 말하는 조커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관객의 야유과 폭소는 종이 한 장 차이이고, 그것들은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코미디언의 몫입니다.


  그만큼 농담이란 것의 모호함을 자신의 생각과 연결 지어 누군가 만든 질서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히스 레저의 조커와 비슷하게도 보입니다만,


  작 중 묘사처럼 아서는 어떤 사회적인 흐름이나 신념, 정치적인 이유로 벌인 일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아서가 조커로써 암흑세계의 심볼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있고요.





III

엔딩

안 웃긴 농담 같은 그의 인생



어머니와 사는 아서

  「조커」의 주제가 마치 사회적으로 불행한 이들의 범죄를 정당화한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애초에 아서 플렉을 마냥 선한 인물로 그려내지도 않고, 조커로 변한 그를 타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작품 전체를 진실이 모호한 농담으로 관통해 내는 감독의 시선과 작품의 서사도 그러한데요.


  마지막 아캄 정신병동 수용소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대비되는 두 장면

  조커가 머레이를 살해한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잘 모르는 시점입니다. 아서의 얼굴에는 분장도 없고, 염색된 초록색 머리도 검게 변했는데요.


  조사관과의 대화에서도 이 엔딩 장면의 사내는 아서인지 조커인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작품 중반부 병원 직원과 나눈 대화에서는,


아서_ 여기(아캄 정신병동 감옥) 오는 사람들은 다 범죄자인가요?
직원_ 뭐, 몇몇은 그런 사람도 있고. 그냥 미친 사람도 있고, 그저 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어요.


  다시 엔딩 장면으로 돌아와서, 어쩌면 앞에 나왔던 모든 서사는 마지막 장면의 아서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인 페니 플렉처럼 자신이 벌인 기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망상일 수도 있고요.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작 중 아서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게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완벽한 끝맺음으로 작품은 다시 한번 「조커」의 정체성과 세간의 우려에 대해 미리 대답하는 셈인데요.


  결국 한 정신병자의 생각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불행이 진짜였건 아니건 실없는 농담을 던지듯이.


  아서는 단지 한참을 웃다 뭐가 웃기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농담이 생각났다고 말하곤, 한 번 들려달라는 말에 대답합니다. 내 개 같은 코미디를,


이해 못 할 거야.



구독, 댓글은 에디터에게 큰 힘이 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린 거짓말로 닮아있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