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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Mar 18. 2024

빗금 친 어제를 돌아봤어요

「룩 백」, 2021

*「룩 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INTRO



  학창 시절, 우리는 오답노트를 한 번쯤 써보곤 합니다. 깎여나간 점수에 아쉬워할 새 없이 꼴 보기 싫은 문제를 공책에 손수 옮겨 적어 다시 풀고, 어떤 부분에서 실수를 했는지부터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점검합니다.


  지저분하게 글자들이 낙서된 시험지를 벗어나 깨끗하고 정갈한 새 공책의 사각형 한 칸에 내가 멍청했던 이유를 꾸역꾸역 적어 넣는데요.


  노트를 검사해 주는 누군가가 빨간 선 양 끝을 다시 부드럽게 이어 붙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처음부터 틀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따금씩 내 삶이 마구잡이로 긁혀 뭐가 뭔지 모를 때면, 내 N번째 실수의 숫자에는 빨간 빗금이 쳐져있는 듯 한 불안감에


  얇은 종이 한 장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던 어릴 때의 오답이 참 부럽습니다.






국내 정발판 표지

「룩 백」, 2021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으로도 잘 알려진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룩 백」입니다. 2021년 공개 당시 대중과 평단의 열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2024년에는 애니메이션 개봉 소식도 전해졌는데요.


  작품은 학급신문에 네 컷 만화를 기고하던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가 다른 성격, 환경, 목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화로 이어지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제겐 이 작품이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으나 짧은 단편으로도 독자를 휘감는 연출, 독특한 엔딩 시퀀스와 "룩 백"의 장치는 큰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만화 공식 소개문

‘만화’로 이어진 두 소녀의 마음.
영원히 잊지 못할 두 사람만의 소중한 추억.

자신의 재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후지노와 은둔형 외톨이인 쿄모토.
시골 마을에 사는 두 소녀를 서로에게 이끌어서 묶어 준 것은
만화 그리기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시간은 흘러도 등 뒤를 든든히 받쳐 준 것은 언제나…

유일무이한 터치로 그려 내는 청춘 장편 단편집.





I

줄거리


  초등학생인 후지노는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만화를 그리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느낌이랄까요. 


  만화를 학급 신문에 연재 중인 후지노는 어른들과 친구들의 호응에 너스레를 떨며 막연하게 찾은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합니다.


  그러나 후지노는 언제부턴가 학급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는 또 다른 아이, 쿄모토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요.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아 얼굴도 모르는, 쿄모토의 '만화'도 아닌 네 컷 그림.


쿄모토의 「방과 후의 학교」

  쿄모토의 작품은 후지노의 만화처럼 스토리가 있지는 않았지만 초등학생의 그림이라기엔 실로 대단했습니다.


  반면 재치 있는 스토리를 빼면 딱 그 나이대의 실력 정도였던 후지노는 '쿄모토의 그림과 비교하면 좀 평범하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겪은 열등감. 뭐든지 애매한 재능이 최악의 저주라고들 하죠.


2년 간의 폐관수련

  쿄모토에게 질 수 없었던 후지노는 이변을 다짐하며 그림을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뭐든 제대로 시작하면 거대한 산이 그제야 보이는 것처럼 끝없는 데생(소묘)과 인물을 그리기 위한 해부도, 수천수만 장의 크로키를 묵묵히 그려나가면서요.


  자그마치 2년 동안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은 채 그림 연습만 했던 후지노는 자신의 노력의 성적표나 다름없는 학급신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분명 이전보다 발전한 후지노의 그림 실력, 그러나 쿄모토의 그림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결국 후지노는 졸업과 동시에 그림을 관두려 마음을 먹고, 졸업하기 전 담임 선생님의 마지막 부탁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쿄모토에게 졸업증서를 전달해 주러 찾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스케치북

  쿄모토의 집엔 어린아이 혼자선 버리기도 힘들 양의 스케치북들이 쌓여 있습니다. 노력의 차이라기보단 조금 더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후지노와의 어떤 격차가 드러나는 부분이죠.


  후지노는 어째 고요한 집안을 걷다 비어있는 네 컷 만화 원고를 발견하고 그곳에 만화를 그려 넣는데요. 아직 패배의 쓴맛을 잊지 못했는지 약간은 짓궂은 내용의 만화. 


  그러다 우연찮게 종이를 떨어뜨려 자신이 그린 네 컷 만화가 쿄모토의 방문 틈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당황한 후지노는 졸업증서를 두고 달아나려 하고, 부리나케 집 밖을 나서자 등 뒤에서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쿄모토를 마주합니다.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레벨,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쿄모토는 사실 후지노가 기고해 왔던 네 컷 만화들의 열성팬이었고,


  자신감을 잃어 다 그만두려던 참에 다름 아닌 쿄모토의 성원을 받자 후지노는 다시 만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쿄모토와 함께.

두 소녀의 첫만남




II

돌아보다

작품의 연출 포인트


   「룩 백」 에는 인물을 뒤에서 바라보는 컷이 굉장히 많습니다. 학급 신문을 뒷줄로 넘기는 부분이라던가, 작업에 몰두하는 후지노와 쿄모토, 엔딩 장면 등이 그러한데요.


다시 그림을 시작한 후지노

  특히 이러한 컷들은 대사가 없는 정적인 구도와 어우러지며 마치 인물이 뒤를 돌아보길 기다리는 듯한 시선을 공유합니다.


  실제로 줄거리에서 마저 설명드리지 못한 작품의 뒷부분을 포함해 이 [뒷모습, 돌아보다]라는 이미지는 여러 차례 겹쳐지며 하나의 의미를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쿄모토와 찢어져 홀로 데뷔한 만화가 후지노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은 목표로 정진하는 우리를 나타냅니다. 


  그것이 책상 위 종이가 됐건, 컴퓨터가 됐건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죠.


  그러나 작품 속에서 후지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일련의 계기들로 인해 허무함 내지는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번아웃처럼요.


  후지노는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희미해질 때마다 허무함을 느낍니다. 쿄모토를 이기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였던 초등학교 시절, 좁힐 수 없는 실력차를 깨닫고 그림을 관두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쿄모토의 죽음

  후지노가 홀로 만화가로 데뷔한 이후, 자신의 소중한 친구였던 쿄모토가 묻지 마 범행으로 목숨을 잃자 그녀는 자문합니다. 자신이 그날 쿄모토의 집에서 네 컷 만화만 안 그렸어도. 쿄모토가 집 밖에 나오지 않았을 텐데. 내가 대체 만화를


왜 그렸지?


  

처음과 끝에서 돌아본 두 사람

  반면 돌아보는 인물의 모습은 이유를 만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림을 그리던 쿄모토가 방 밖의 후지노를 향해 돌아봤던 순간

후지노가 쿄모토를 처음으로 만난 순간

엔딩에 이르러 쿄모토의 방에서 후지노가 뒤를 돌아본 순간


  흔히 초심이라고 표현하듯 쿄모토는 후지노 덕에 집 밖으로 나와 세상과 부딪히며 예술 대학 진학이라는 발판을 거쳤고, 후지노는 쿄모토로 인해 자신감을 얻어 만화를 다시 시작해 꿈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죠.


  특히 마지막 돌아봄(룩 백)에 어우러지는 쿄모토의 대사는 작품을 관통하는 부분이자 곧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등 뒤에서 찾아낸 시작의 이유와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게 했던 연료.


그럼, 후지노 넌 왜 그림을 그려?


두 소녀의 우정




  

III

빗금

엔딩에 관하여


  엔딩의 연출은 마치 오답노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다시 종이에 옮겨적고, "왜 틀렸을까"라고 생각하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이유를 다시 찾아나가죠.


  쿄모토의 죽음에 절망한 채 그녀의 집을 찾은 후지노는 자신이 그녀를 방에서 나오게 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자책합니다.


IF (만약)

  그러다 어린 마음에 짓궂게 그렸던 네 컷 만화를 찢어버리는데요. 찢어진 조각은 다시 방문 틈으로 들어가 과거의 쿄모토에게 전달되며 일종의 평행세계 혹은 또 다른 분기점을 보여줍니다.


  후지노가 '잘못 생각했다'라고 여기는,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IF의 쿄모토 역시 후지노의 만화를 보고 집 밖으로 나와 예대생이 되었고, 학교에 침입한 괴한과 마주한 것은 동일하나 갑작스레 등장한 후지노로 인해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쿄모토는 단지 의인인 줄로만 알았던 영웅이 사실 어릴 적 팬이었던 '후지노 선생님'이었음을 알게 되자, 집으로 돌아온 뒤 새로운 내용의 네 컷 만화를 그리게 되죠.


이렇게 만나도 괜찮았을 텐데

  이는 다시 바람에 날려 방문 틈으로 나가 쿄모토가 죽은 세계의 후지노에게 전달되며 앞서 설명한 엔딩을 맞이합니다.


  후지노는 마침내 자신이 만화를 그리는 이유를 되찾습니다. 만화가니까 그린 것도, 돈을 벌기 위해 그린 것도 아닌 쿄모토와의 따뜻한 추억들에서 시작된 것인데요.


  만화적인 표현이 사용되었기에 당연히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지만 이 모든 연출들은 후지노가, 인물들이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살아온 삶과 지녀온 꿈에 대한 오답노트를 끝마치는 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유

  다행히도 삶은 꼭 틀리고 맞지만은 않아서, 선분과 원의 의미는 제각각의 삶에 다르게 다가옵니다. 


  또 다른 세계의 쿄모토와 후지노는 독자들의 후회도 안심시키는 듯 보입니다. 그림에서 직선은 단비가 되고 동그라미는 첫눈이 되지 않나요.


  초반부 쿄모토를 처음으로 만나고 후지노가 신이 나 비까지 맞으며 춤을 추는 장면처럼요. 마치 "이 컷은 못쓰겠다"는 듯 마구 내리는 비를 표현한 빗금들. 거기서 모든 것을 시작했던 후지노. 


  오답노트는 결국 그때가 아닌 이제를 위한 회고입니다. 다시 틀리고 틀리고 또 틀리러 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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