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봉준호 감독의 디스토피아 마스터피스, 「설국열차」입니다. 어느덧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그 주제의식은 뒤통수에서 발사 돼 앞통수로 날아오는 듯싶은데요.
점점 일상에 스며드는 계급의식과 사회적 시스템을 전복시키고 싶어도 시스템의 바깥을 두려워하는 우리들. 새치기를 하고 싶은 이들과 줄을 벗어나려는 이들. 가뜩이나 물질만능주의가 짙어지는 듯한 요즘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지 않을까요?
인류 그 자체를 태운 기차가 무한히 달립니다. W라는 글자를 숭배하며 익숙해진 고속 안에서 '꼬리 칸의 혁명가' 커티스는 천천히,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갑니다.
*본 글은 영화 「설국열차」와 소설 「멋진 신세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한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하려던 계획이 틀어져 세상은 꽁꽁 얼어붙게 되고
모든 걸 얼려버리는 추위는 자그마치 17년이나 지속되고 있는데.
한 편 지구의 유일한 생존 가능 구역이자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
살아남았다는 생존자들의 안도감도 잠시, 기차는 엔진과 가까운 앞 칸으로 갈수록 호화롭게,
꼬리칸으로 향할수록 극도로 열악해지는 환경을 갖게 된다.
전혀 평등하지 않은 신세계新世界. 꼬리칸의 원로 길리엄과 정신적 지주인 커티스는 혁명을 해 엔진을 차지하려고 한다. 동시에 그들을 막기 위해 앞칸은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다.
피와 살점, 얼어붙음과 흘러내림이 '커티스 혁명'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알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속 '디스토피아'를 완성하는 키워드는 바로 안정입니다. 실제로 소설 속 신세계는 그곳에 속한 모든 이가 행복한 세상인데요.
태어나서부터 알파부터 엡실론까지 우열을 가리는 등급이 매겨지지만, 갓난아기부터 행해지는 세뇌로 그곳의 사람들은 자라서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 정부에서 배포한 '소마'라는 마약류 각성제 덕에 잠깐의 울적함조차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죠.
설국열차라는 공간도 이와 사뭇 닮아 있는데요. 새로운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영화 속 표현대로 이젠 인류 그 자체가 되어버린 승객들을 태운 열차는 안정이자 균형이라는 구실로 유지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없이 팽창하는 삶의 계급. 수저론이나 계급 사다리 등 태양에 닿을 듯 우뚝 솟아난 신분의 기둥은 옆으로 뉘어 달립니다. 이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없어질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걸 암시하기도 하죠.
작품의 반전 역시 열악한 꼬리 칸을 구원하고 맨 앞칸의 엔진을 차지하려던 ‘커티스 혁명’이 사실 '시스템의 유지'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혁명이 포화 상태에 놓인 열차의 인구 감소를 도와준 셈이었고, 이젠 노인이 된 윌포드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제안하자 그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이는 후술 할 시스템을 바꾸려던 시도의 방향성이 잘못된 것이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설국열차」와 「멋진 신세계」 두 작품에서 나오는 공간 모두 개인은 전체(공동체)의 발전과 존립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전체주의적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네 자리를 알라
출산과 연애는 죄악시되었지만 인공수정과 육체적 관계에는 익숙해져 버린 헉슬리의 신세계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지우기 위해). 아쿠아리움처럼 인구수를 유지해야만 하는 열차.
또 마찬가지로 두 작품 모두 시스템을 흔드는 존재는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삶에 염증을 느낀, 시스템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인물들(커티스, 버나드)이기도 합니다.
존엄성이 사라진 사회에선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전체의 안정이고, 죽음과 삶의 끝없는 순환을 돌게 만드는, 말없이 숨만 쉬는 엔진이니까요.
작품 내내 엔진이 승객들을 살렸다며 그토록 엔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관객은 서서히 엔진의 무의미함을 깨닫습니다. 윌포드는 말없이 웅웅대는 엔진을 돌보며 외로움을 느끼고, 커티스 역시 그런 엔진을 기다렸다는 듯 물려주는 윌포드를 보며 혼란에 빠지는데요.
인류는 왜 살아야 하고 왜 세상은 굴러가야 할까요? ‘인류 전체’를 위한 삶은 사실 열차의 엔진처럼 중요하다고 강조되지만, 사실은 별 의미가 없거나 목적을 잃어버린 가치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나'를 지워내야 하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걱정 없는 삶, 방지턱 없는 삶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려다 폭삭 늙어버리기도 합니다.
설국열차의 공간은 분명 판타지적이지만, 곧 우리가 사는 사회를 재현한 세트장에 가깝습니다. 주연은 정해져 있지만 엑스트라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삭막한 연극은 막을 내리기 시작하고.
여러분이 음악시장을 바꾸고 싶으면요, 뮤지션 말고 음반회사의 임원이 되어야 해요.
_ 김심야
'이 거지 같은 세상', '답 없는 인생' 우리는 팔레트를 들고 인생이란 그림을 그리다 작품의 제목을 정해버리고는 합니다.
두 작품에는 앞서 말한 시스템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인물 외에도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영화의 남궁민수와 소설의 야만인 존이 그러한데요.
벽인 줄 알고 살았는데 사실 이것도 망할 문이란 말이지.
커티스와 버나드, 남궁민수와 존. 두 부류 모두 시스템의 승자가 되고자 했으나 성격은 조금 달랐습니다. 시스템에 가까이 다가가 성배를 넣으려는 부류와 그 바깥으로 나가려는 부류.
중반부 남궁민수는 빙하기인 줄로만 알았던 바깥세상이 변했을 가능성을 포착합니다. 이내 윌포드의 엔진실을 열기보다는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싶어 하는데요.
일직선으로 쭉 뻗은 열차에 수직선을 그리려는 인물로서 작 중 주요 인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혁명을 이루고자 합니다.
비윤리적인 시스템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혁명을 주도한 커티스보다 진정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보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남궁민수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기차 밖에 나가면 죽는다'라는 정보를 무방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죠.
이는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탈선에 대한 거부감,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것이라는 현대인의 공포를 상징합니다. 내 분수에 걸맞은 것과 내 환경에 어울리는 미래를 그리지 않으면 왜인지 불안감이 엄습할 것만 같죠.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 존 역시 원시적으로 살아오다 신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곳을 이탈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자조차 곁에 둘 수 없는, '모두는 모두의 것'이라는 신세계의 전체주의적 모토를 거부하고 도망가지만 이내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다 결국 목숨을 끊고 마는데요.
존의 사망이 신세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이지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던 존의 최후가 주는 진정한 공포는 무시할 수 없죠.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설국열차」는 인간들이 타고 있는 열차로 '사회 시스템'을, 그 안에서 펼쳐진 군상극으로 선택지를 주는 듯합니다.
나는 세상의 바깥으로 나갈 용기가 있는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게 커티스처럼 물질적인, 지위적인 보물이라면 안정을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가?
어쩌면 영화가 권유하는 관객의 대답은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러워서 내가 떠난다
더럽고 냉혹하기만 한 세상. 착하게 살기 참 어려운 세상. 세상의 엔진에 의해 끌어당겨진 자와 스스로 걸어 나간 자. 「멋진 신세계」의 서론에선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깨끗해지기 위해 오물 위를 구르는 것은 바보짓이다
엔딩에 나오는 북극곰에 대해선 많은 해석이 오가고 있습니다만 필자는 희망적인 엔딩이라고 봅니다. 물론 어린 소년과 소녀가 눈 덮인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극악으로 어렵겠지만,
작 중 내내 언급된 열차 바깥에 대한 정보라곤 '얼어 죽는다' 뿐이었기에 그에 완벽히 상반되는 '열차 바깥의 생명체'를 보여주며 희망을 전하는 듯싶었기 때문인데요. 또한 북극곰이 굶어 죽지 않은 걸로 봐선 어딘가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숨 쉬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봉 감독의 「설국열차」. 과거 디스토피아 고전명작의 영광을 물려받아 새로이 창조해 낸 또 다른 명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순수 재미로 생각하면 「기생충」 보다 점수를 더 높게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작 만화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공간과 인물들의 사투,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는 주제의식 등 영화로서의 재미와 예술로서의 사색을 깊게 담아낸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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