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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예술 Nov 05. 2024

시대의 살인

「살인의 추억」, 2003

INTRO


2005 - Owen Ovadoz


  당신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추억하나요? 지금보다 정이 많았고 더 상식적이었던 때라고 돌이키곤 하나요?


  '쫓을 추'와 '생각할 억'으로 이루어진 말, 추억(追憶). 또 그런 추억을 가능케하는 과거의 기록인 기(記)억.


  차이점이라면 기억은 그 시절을 지금으로 가져는 것이고, 추억은 그때의 나를 쫓아과정이 아닐까 싶은데요. 또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과거의 기억들은 곧 '나'라는 개인에 의해 추억되며 '그 시절'이라는 이름의 시대로 재탄생되곤 합니다.


  다만 언제나 과거 미화를 일삼는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대 속 끔찍했던 일들을 묻어두곤 합니다. 기억으로 집약된 아픔을 추억으로 마모시키며 '그땐 그랬지'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요.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 2003

・ 봉준호 감독 /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외


  봉준호 감독의 작품 '살인의 추억'은 실제로 오랫동안 미제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스릴러 형사물입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기를 이끈 명작 중 하나이자 작품 자체의 장르적인 재미로만 보아도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함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인데요.


  허나 군부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또 형사들의 수사를 방해하는 요소 중 당시 시대상도 포함되는 만큼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그 시절'을 좋게 좋게 추억하고 마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흉악범을 길러낸 시대를 기억하라
- 박평식 평론가 -



  높은 빌딩과 재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대신 넓게 드리운 논밭과 굉음을 내는 경운기. 그땐 그랬듯 벌어지는 학생 시위와 최루탄 연기 속 새어 나오는 비명과 고함들.


  어찌어찌 조용하던 시골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는 성격은 딴판이지만 수명을 팔아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은 두 형사가 뛰어듭니다.





I

두 형사



두만과 태윤

  작품의 줄거리는 앞서 설명했듯 두 형사가 지역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범인 잡는 눈깔'을 가졌다며 모든 것을 직감으로, 또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려는 박두만(송강호 扮)과


  서울 출신 형사로 박두만보다는 지능적인 수사를, 또 그의 대사처럼 직감보다는 서류를 신뢰하는 형사인 서태윤(김상경 扮)이 주요 인물이죠.


  수사 방식에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은 작품 중반부까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용의자를 잡아다가 고문하고 강압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박두만과 조용구의 모습은 영락없는 구시대적 인물임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한국은 땅덩어리가 작아서, 발로 몇 번 뛰다 보면 다 밟히게 되어 있거든!
너처럼 잔머리 굴리는 놈은 미국이나 가!


  반면 서울 깍쟁이 형사였던 서태윤은 지역 형사들의 수사 방식을 처음부터 혐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극에 달하는 스트레스, 또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박해일 扮)의 등장으로 태윤의 태도 역시 변하게 되는데요.


  특히 자신이 챙겨주었던 동네 소녀가 살해되자 누구라도 벌해주고 싶은 마음에 '박현규가 범인이어야만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기에 이르죠.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해

  반대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가는 박두만은 점점 차가워지는 머리로 사건을 대하려고 합니다. 마구잡이로 정해두었던 용의자 노트를 찢는가하면 박현규 폭행하는 서태윤을 뜯어말리는 등 결국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성향이 서로 반대가 되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작품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최후반부에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볼 수 없다'는 DNA 검사지를 확인하곤 그토록 서류를 맹신하던 서태윤은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혐오하던 방식대로 박현규에게 '네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라'며 다그치며 협박하죠.



  두만 역시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직감을 사용해 보지만 박현규의 눈을 또렷하게 응시해도 그 속에서 보이는 건 허망한 자신의 모습뿐. 결국 범인을 잡는 데 실패한 두 형사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때'라는 텅 빈 무대에서 서성일뿐입니다.


모르겠다, X발.. 밥은 먹고 다니냐?





II

시대의 살인

・ 숨겨진 메시지



  끔찍한 범죄이자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인 살인을 추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고서야 말이죠. 어딘가 역설적인 이 말은 작품의 제목으로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표방합니다.


그땐 그랬지

그 시절을 당신은 어떻게 '추억'하는가?


  사실 작품을 잘 살펴보면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감독의 노골적인 시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군홧발로 시위대를 짓밟던 조용구의 모습과 시대의 폐쇄성을 나타내는 등화관제.


  또 결국 군화를 신던 발을 파상풍으로 인해 절단하고 마는 조용구 형사와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의 범행을 돕는 게 되어버린 등화관제와 경찰 중대원들의 시위대 진압.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의 수상한 점들이 사실 운동권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꽤나 말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누구냐 넌

  결국 무고한 여성들을 살해한 범인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시대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버립니다. 그저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이 있었던 때로요.


  이러한 아이러니와 작품의 메시지, 서사가 완벽하게 삼박자를 이루는 장면이 바로 마지막 장면인데요.


  범인 검거에 실패한 뒤 형사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다 가정까지 이룬 박두만은 시간이 흘러 다시 사건 현장을 찾습니다. 끓는 피로 밤낮을 뛰어다니던 형사 시절을 추억하기도, 또 해결하지 못하고 떠난 과제를 씁쓸해하는 듯도 싶죠.



  첫 피해자 시신이 발견되었던 도랑 밑을 보던 그는 동네 소녀에게서 '얼마 전에 어떤 아저씨도 여길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두만은 잠시 형사로 돌아간 듯 소녀에게 '그 아저씨 얼굴 어떻게 생겼느냐'라고 묻는데요.


 그냥.. 평범해요.

  

그냥, 평범해요

  자신에겐 '그냥 특이한 아저씨'였던 남자를 기억하는 소녀와



  '그 시절'을 추억하는 두만.


  진정 '그 시절'을 곧이곧대로 추억한다면, 우리의 표정은 이래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배우는 절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불문율과 다르게 이례적으로 카메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두만의 마지막 모습은 자타공인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까지도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이 영화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만들어진 씬이라고 하는데요.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실제 사건의 범인은 오늘날 드러났지만, '살인의 추억'이 남겨둔 것은 그것만이 아니기에 더욱 명작으로 거론되는 듯합니다.


  필자는 보통 한국 영화를 추천해 달라 할 때 꼭 언급하는 영화입니다. 꼭 다각적인 해석과 깊은 탐구 없이도 장르 영화 자체로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기 때문인데요.


  두 형사의 감정선 변화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당시의 모습, 또 조금씩 수사망을 좁혀나가는 희열이 엄청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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