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빛이 참으로 인색한 2025년 가을이다. 서유럽의 부족한 햇볕을 우리나라, 청명한 가을의 나라에서 겪고 있다. 지난봄에는 5월에도 몸을 옴 추리게 추웠고, 열대야가 끝없이 지속되는 여름과 장마 같은 비가 내리는 가을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겨울의 11월 첫눈에 소나무가 집단으로 비명횡사하기도 했다. 날씨의 이상 변화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닌데도, 막상 겪고 보면 사람이 산업혁명과 개발(문명)이란 이름으로 행한 지구환경 교란 행위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한다.
가을비가 많으니, 모기의 기세가 등등하다. 꽁꽁 싸맨 아파트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저는 단백질을 취득하여 후손을 낳고자 하는 절박한 생명 활동이겠으나, 당하는 아이의 피부는 보기 안쓰럽다. 산에서, 주말농장에서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언제 물렸는지도 모르는 채 부풀어 오르는 피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해바라기 가득한 들판에서 한 송이 봉선화꽃이 눈에 띄기는 쉽지 않듯이 온통 산수유로 가득한 마을에서 수줍은 듯 노란 꽃 한 송이를 줄기 끝에 달고 있는, 더구나 꽃잎을 접다시피 한 꽃을 지나치는 게 무정한 것은 아니다. 이름도, 모습도 처음인 ‘황촉규’를 만난 곳은 이천 산수유 마을 진입로 길가였다.
길을 나서면 기대가 부풀었다.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멋진 이벤트를 기대하고, 크고 화려한 시설을 생각하는 사이에 차창 밖으로 나무와 꽃과 풀들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視而不見. 지금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그렇게 ‘나중’을 보며 살았다. 聽而不聞. 집안을 거두고 보살피는 가장의 당연한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 ‘멀리 바라보기’의 생활방식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이들의 걸음걸이는 더디다. 목표 지향성이 사그라든 자리에 목적이 들어온 듯하다. 그들에게 풀, 나무, 꽃은 지나치는 풍경이 아니다. 생명체를 자세히 바라보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도 먼 산을 보며 생각한다. 저 산에는 어떤 나무가 살고 있을까. 무슨 꽃이 피어있고 향기는 어떨까. 나무가 키우는 잎사귀와 열매는 바람에 어떻게 흔들리고 있을까. 그들은 ‘저곳’ 대신 ‘이곳’에서, ‘나중’이 아니라 ‘지금’을 딛고, 작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 관심이 구체적이어서 관념적이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 더구나 책을 함께 읽는 이들과 이천 산수유마을을 걷고 있다. 그들도 처음인 듯한 ‘황촉규’를 만났다. 딱 한 송이 꽃이 가지 끝에 매달렸고, 꽃 진 자리마다 씨앗이 달렸다. 보라색 외피에 싸인 씨앗은 목련의 겨울눈을 닮았다. 고려불화 속 부처님 옷자락 같기도 하고 성당 미사 보 같기도 한, 보드랍고 연한 꽃잎에 달팽이 한 마리가 아이 주먹 같은 더듬이 두 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는 이 시간을 저장하기로 한다. 글을 쓰고 사진 속 ‘황촉규’를 도화지에 옮긴다. 시간이 흘러 이 글과 그림을 들여다볼 때, 그해 봄의 추위와 여름 열대야와 그치지 않는 가을비. 그리고 그때 산수유마을의 사랑채에서 리큐르를 마시며 나누었던 “꽃향유”와 “목화”와 “허태임” 등속들과, ‘제주 귤밭에서 까먹던 귤껍질 즙이 튄 아내의 옷 내음’ 같은 향기가, 내 어린 날의 흑백사진에서처럼 이 시간을 저장하고 있기를 바란다. 사진 속에는 이 식물의 특징을 알려줄 잎사귀도, 변변한 줄기 모양도 보이지 않아서 이 생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그리되지 않을 거 같다.
그렇지만 그림 속 ‘황촉규’는 그 시간 속에 흐르던 표정과 말과 향기 그리고 마음속에 흐르던 따스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