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구토>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한다라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을 유지하는 것은 나다. 바로 나다. (중략).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해. 왜냐하면 그것도 생각이기 때문이야. 아, 이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건가?
이 문장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몇 년 전 첫 번째 의사 선생님과 치료를 할 때, 선생님은 내 글을 보시고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이 좀 더 superficial하게 지나가요. 그런데 자영씨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보통은 이런 실존적 고민을 잘 하지 않아요. 상담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상담 선생님이 자영씨에게 잘못 걸렸네”. 선생님은 이 말을 하시며 가볍게 웃으셨다. 내 고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나는 그 후로 진료시간에 다시는 실존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상담 시간에도 굳이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작년에 나를 3개월 정도 맡았던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영씨가 생각하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내가 정상적이지 않은 거구나. 과하게 생각이 많은 거구나.
나는 내 존재에 대한 생각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췄다. 가끔 그걸 꺼내들어 생각을 하더라도, 그 이유를 외부에서-지금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것처럼-찾으려 했다. ‘내 존재를 부정하는 건 어릴 때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거야. 애착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자학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번에 <구토>를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나도 로캉탱처럼 그저 인간 존재에 대해 구역감을 느끼는 거라고. 내 존재 이유를 자꾸만 찾아봐도 찾지 못해서, 범람하는 생각들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리고 이 고통을 겪느니 죽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이제 내가 ‘나’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난 더 이상 나 자신을 잘 느낄 수 없다. 그 정도로 나는 잊혀버린 것이다. 내 안에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 존재뿐이다.
요즘 나는 자주 무료함을 느낀다. 평일에는 낮 12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대충 끼니를 챙기고 출근해서 몇 시간 일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온다. 집에 와서도 바로 침대에 누워버린다. 삶이 너무나 무료하다. 주말에 회사에 출근해서도 기계적으로 일하고, 친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 맛있는 걸 먹어보기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뮤지컬을 본다. 이상하게도 하루 일정을 꽉 채워 많은 것들을 한 날이면, 더 무료하고 공허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무료함을 없앨 수 없다. 이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난 더 이상 나 자신을 잘 느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도, 어떤 것을 원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말 그대로,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우주에서 유영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사실을 말하자면, 난 지금 펜을 놓을 수가 없다. 지금 구토가 올 것 같고,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그걸 지연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쓰고 있다.
로캉탱은, 글을 씀으로써 삶을 지속해나간다. 하지만 그 또한 그저 ‘지연’일 뿐이다. 나는 어떤 행위를 하면서 삶을 지연시키고 싶지 않다. 아이러니하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고통을 줄이려 하는 건 맞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나는 답을 찾고 싶다.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죽지 않아야 할 이유,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이어나가야 할 이유. 만일 그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걸 인정하게 될 때까지, 답을 찾아보고 싶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삶을 지연시키는 행위인 것 같아서 또 우습지만,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인 걸.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조차 지독하게 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