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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건 Oct 31. 2024

#2_NPC

산마루에서 물줄기 머무는 강까지
세계의 길은 끝없이 흩어진다


주인공은 험준한 능선을 오르며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어떤 이는 고요한 강가에 서서 이 세상의 파도를 담담히 마주한다


주인공은 비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비상하고
어떤 이는 별빛 아래서 비밀스러운 꿈을 일군다


주인공의 길은 찬란히 타오르지만
어떤 이의 잔잔한 발자국에도 서사가 스며 있다


주인공은 시간을 넘나들며 신화를 써 내려가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세계에 꽃을 피우며 내재된 존재의 언어를 읊는다


비록 기억은 주인공의 이름에만 머물지라도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꿈을 가꾸는 이들이 있다




RPG 게임 속에서 NPC라는 존재는 배경 속에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상점 주인, 여관 관리인, 혹은 스토리의 외곽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 그들에게는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Non-player character, 즉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들이죠. 그저 조용히 자신의 위치에 서서 주인공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NPC들에게도 눈길을 주곤 합니다. 고정된 대사와 단조로운 움직임 뒤에 숨겨진 삶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거든요.


거대한 오픈월드 게임에서는 NPC마다 고유의 이야기가 담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배경을 찾아내고, 그들이 살아온 삶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주인공이 아닌 인물들마저 그들의 삶에서는 단 하나뿐인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죠.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어쩌면 현실의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주인공처럼 보이고, 또 누군가는 단조로운 일상 속을 반복하는 NPC처럼 느껴질지 모르죠. 저 역시 한때는 세상의 큰 그림 속에서 조용히 묻혀가는 조연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 삶이 특별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흐르는 대로 맡기고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순간들을 지나쳐 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이 삶의 무대 위에서는 나 자신이 주인공이더군요. 우리가 걷는 길, 그 속에서 쌓여가는 작은 순간들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비록 누군가의 시선에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라 해도, 내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단 사회적인 성공이나 유명세만이 주인공의 조건은 아니니까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거기에 있음(Dasein)'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어떤 인물이든 그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메시지죠.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독창적이고 귀한 것이니, 모든 이가 주인공인 셈입니다.


게임 속 NPC는 주인공의 여정 속에서 스쳐가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그들 각자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삶을 가꿔 나가는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삶을 비추며 나 자신을 보잘것없이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비교 속에서 놓치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를 가꾸는 시간들이 아닐까요?


지금도 저는 게임을 하며 NPC의 대사를 꼼꼼히 읽어보곤 합니다. 그들이 반복하는 평범한 대사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과 사연이 엿보이니까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삶의 무대에서 NPC가 아닌, 스스로를 주연으로 당당히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비록 소리 없이 흘러간다 해도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존재로 세상을 풍성하게 만드니까요. 자신만의 꽃을 가꾸고,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주인공의 삶이 아닐까요?


윤태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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