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함께 듣고 있으면 보령약국 광고가 나오곤 했다. "보령약국은 종로5가에 있습니다. 종로5가 보령약국" 중후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던 그 광고.
종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초등학생 아이는 '지천에 널린 게 약국인데 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할까?'라는 궁금증을 가졌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CM송과 보령약국은 기억너머로 사라져 갔다.
그렇게 15년 즈음 지났을까?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한 나는 종로5가역에 있는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주 다섯 번씩 종로5가역 1번 출구로 나와 보령약국을 지나 출근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기 바빠서 약국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어 달 지났을까? 불현듯 어릴 적 주입식으로 각인되었던 보령약국 CM송이 생각났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약국이 뭐가 그렇게 특별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은 직접 방문해 본 후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약값이 저렴했다.
근처에 보령제약 본사가 있어서 그런 걸까? 회사 이름을 걸고 하는 약국이라서 그런 걸까? 일반 동네 약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약값은 사람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약값이 부담스러운 어르신들에게 보령약국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내가 본 보령약국은 정말 기계처럼 돌아갔다. 수많은 약사가 쉴 새 없이 상담을 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약사가 말한 약을 빠르게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은 약국이 아닌 흡사 작은 중소기업 그 자체였다.
저렴한 것 외에도 이 약국은 어떠한 상징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코로나가 한창일 시기, 뉴스 보도를 위해 나온 기자가 수많은 약국 중에서도 보령약국을 택하여 그 앞에서 주어진 멘트를 읊었다. 이 약국이 배경인 것만으로도 어떤 메시지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갑사정이 궁한 사람만이 이곳을 찾을까? 아니었다. 주차구역조차 없는 이곳에 하루는 마이바흐가 서있었다. 벤츠, 볼보, 아우디 등 약값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은 등급의 차를 끄는 사람들도 이곳에 왔다. 어쩌면 운전기사분이 회장님을 회사에 모셔다 드리고 잠시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약을 파는 이곳과 누군가는 평생을 벌어도 타지 못할 고가의 차가 나란히 있는 모습은 언제나 아이러니하고 이질적이었다.
회사가 달라진 지금, 나는 더 이상 종로5가로 출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령약국은 종종 생각난다. 보령약국은 나의 과거에도 있었고 나의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보령약국에 방문하는 수많은 노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