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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주 Nov 24. 2024

보이스피싱범 골탕먹이는 유쾌한 AI 할머니

영국 통신사 오투(O2)가 선보인 가상인물 서비스

나에게는 82세이신 시 삼촌이 계신다. 영국 시골마을에서 마당 가꾸며 혼자 사시는 연금생활자로, 최근 항암치료를 마치고 건강히 제2의 삶을 사신다. 그즈음 되면 외로운 독거노인을 상상하기 쉬운데, 항상 웃는 얼굴에 주위사람들과 이야기를 즐겨하셔서 그런지 지역 조찬모임, 독서모임, 종교생활로 활동적인 노년이다.


시 어머니와 통화를 나눈 남편이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한다. 내용을 들어보니 며칠 전 보이스피싱을 당하셨단다.


영국 통신사 오투(O2) 콜센터 직원이라고 밝힌 여성이 시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와,  사시는 지역이 시골이라 통신 품질이 좋지 않으니 통신요금제 할인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연금생활자가 생활비를 아끼는 방법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동의하니 통신사 가입하면서 발급받은 OTP에 방금 전송된 번호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사은품 배송지로 요청하는 대로 집 주소를 알려준다. 이후에도 계속 기다리라 하는 것이 수상해 전화를 끊으셨단다. 시삼촌은 순간 이상하다 싶어 해당 통신사 대표콜센터로 직접 전화를 건다.


알고 보니 시 삼촌 앞으로 천 파운드(한화 170만 원) 상당의 최신 핸드폰 구매 오더가 잡혀있다. OTP를 통해 등록되어 있던 계좌와 메일 정보들이 보이스 피싱범들에게 전달되도록 연락처가 업데이트되어 있다. 바로 경찰에 해당 사건을 신고하고 통신사는 주문 취소와 함께 보이스 피싱 피해건으로 접수한다.


평화로운 시골 삶을 사시는 어르신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이렇게 바보처럼 당했냐며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펑펑 우셨다고 한다. 다행히 금전적인 피해는 막았지만 정신적 피혜가 크다. 어르신은 이제 남들의 호의가 의심스럽고 전화통화하기 겁이 난다고 하신다. 이런 사기를 당해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다며, 크게 낙담하신다.   


신고받은 경찰은 어떻게 개인정보가 유출됐는지 특히 해당사의 OTP 정보 유출 관련 전방위적인 경찰 조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조카는 삼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다음부터는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 말고 비슷한 전화가 오면 이메일로 정보를 보내라 하고 끊으시라 말씀드린다. 사실 이런 방법만으로는 사기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충분치 않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Daisy @ Virgin Media O2

이런 사기 피해가 시삼촌께만 일어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난 19일 미국 포브스 등 외신보도에 따르면 영국 이동 통신사 오투가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해 AI 모델 ‘데이지(Daisy)’를 선보였다.


오투 측은 “데이지는 범죄자들이 사람을 대상으로 사기 쳤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실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고 밝혔다.


직접 발표된 AI 프로그램 데이지를 시청해 보니, 전형적인 영국 할머니 말투로 보이스 피싱 사기범들과 통화 중이다. 자신의 고양이 얘기, 생활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말한다. 잘못된 계좌번호를 알려주어 사기범들에 혼선을 주기도 한다. 결국에는 보이스 피싱범이 짜증을 내거나 욕을 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시간낭비 중임을 알고 알아서 전화를 끊기도 한다.


시청하는 내내 최근 시삼촌의 피해사례가 떠올라 복수라도 한 듯 속이 다 시원하다. 보자마자 해당 기사와 데이지 프로그램 링크를 시 삼촌과 시 어머니께 보냈다. 부디 피해사실이 내가 잘 못해서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지능적으로 나쁜 사람들을 만난 그저 운 나쁜 하루였다고 위안하시기를 바란다.  AI 기술을 선한 의도로 사용하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꼭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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