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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만난 회 한 접시의 교훈

세상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by 세반하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순 없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고 배워 온 삶의 진리다.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일, 그 사이에서 타협하고 조율하는 ‘선택’들이 모여 인생이다.


나는 영국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이 삶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은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현지에서 가질 수 있는 것에 기쁨과 의미를 둔다.


지난주 열감기를 앓은 탓에 몸이 지치고 기운이 없다.

바닥난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려보겠다고 점심시간을 쪼개 운동을 갔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영국 현지 아시안 음식점 방문과 몇 번의 실패 후, 나는 웬만하면 밖에서 사 먹지 않는다. 직접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해 먹는 것이 맛도 좋고 양도 넉넉히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무심히 지나치던 동네 회전초밥집이 눈에 띈다. 대형 프랜차이즈점인데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 제법 괜찮은 곳인가 싶기도 하다.


평소 점심 메뉴인 깔깔한 샌드위치보다는 보드랍고 신선한 회 한 점이 먹고 싶다.

음식점에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우선 따뜻한 녹차 한잔을 주문한다. 벽안의 주인장은 컨베이어 벨트 위 골라 먹는 회전초밥 또는 단품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고 친절히 설명한다.


내가 소싯적 회전초밥집에서 정신줄을 놓고 먹다가 십 여만원어치 우습게 한 자리에서 해치우던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오늘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울 준비가 되어 있다. 집 나간 입맛을 돌려준다면 말이다.


부푼 마음에 젓가락을 들었지만 허공에서 서성인다. 컨베이어 벨트 위 마요네즈를 잔뜩 품은 서양식 캘리포니아롤과 애피타이저 몇 개가 돌고 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메뉴판을 훑어 마음이 가는 참치회 한 접시와 연어 아보카도 마끼를 주문한다.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음식이 오고 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아뿔싸.


해동이 지나쳐 흐물흐물한 참치회는 눈으로 본 그 맛과 같은 식감이다. 단지에 있는 생강 초절임을 평소보다 더 많이 곁들인다. 기운 챙기러 들어왔다가 배탈까지 나면 큰 낭패다.


마끼는 내용물이 충실하지 못한 데다가 두른 김이 눅눅해져, 흐드러지게 피우다 이제 곧 사라질 꽃병 속 꽃송이 같다. 다행히 안에 든 연어와 아보카도가 기본값은 해준 덕에 그나마 맛있다.


밍밍한 녹차로 입안을 정리한 후 계산서를 요청한다. 녹차 한잔, 참치회 다섯 점, 연어 마끼. 18파운드(한화 삼만 삼천 원)되시겠다. 사실 금액은 둘째고, 먹고 나왔는데 배고프니 슬프다.

부풀었던 기대만큼이나 쪼그라든 실망감이 몸과 마음을 더 허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회사 점심시간, 서울 시내 골목마다 있던 그 흔해 보이던 참치횟집들이 눈에 선하다.

그때 쉽게 얻을 수 있어 당연한 줄 알았던 신선한 회 한 접시가 이리 그리울 수 없다.

무엇이든 가졌을 때는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귀한 줄 안다.


오늘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겉이 바삭하고 큼지막한 사우어도우 빵에 맛 좋은 치즈, 영국 수제햄을 사야겠다.

한국 마트 한복판에서 그 맛이 없다고 그립다 했던 영국맛 말이다.


세상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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