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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Paloma Nov 11. 2023

덕수궁(德壽宮) Deoksugung

"덕수궁"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가?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드는 정동 일대와,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설이 깃든 돌담길 그리고, 현대미술관... 정도일 것이다. 궁궐임에도 뒤로 산을 끼지 않았고 민가와 섞여있으며, 조선의 5 궁궐 중에 가장 작다. 이는 처음부터 왕실이 계획하지 않고 우연한 기회에 궁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모와는 비교될  없는 수많은 역사순간을 함께한  또한  덕수궁이다.


석조전 서관 (石造殿 西館) _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덕수궁 일대는 원래 신덕왕후(태조의 계비)의 릉이 자리하고 있어 정릉동으로 불리며 그 주변으로 왕족과 권세가들이 저택을 짓고 살던 동네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불태우고 정릉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화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1593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정릉동 집을 임시 거처로 삼고, 창덕궁을 재건하는 동안 머무는 곳이라 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당시 사가에서는 보기 드문 정면 8칸, 측면 3칸의 대단한 규모의 이층 집은 '임금이 머무르는 집'이라는 뜻의 '석어당(昔御堂)'으로 이름지었다. 임진왜란의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선조는 창덕궁의 완공을 끝내 못 보고 1608년 이곳 '석어당'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이 완공되자 정릉동 행궁을 떠나면서 이곳을 경운궁(慶雲宮)라 이름 짓고, 궁궐밖에 임금이 머무는 이궁(離宮)으로 만들기 위한 수리와 공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1623년 반정으로 왕권을 장악한 인조가 공사를 중단시킴으로 경운궁은 왕가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석어당 (昔御堂)
준명당 (浚眀堂)과 즉조당 (卽阼堂)

경운궁은 그렇게 왕실 사람들에게 잊히는 듯하다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1년 후 1897년 정궁이었던 경복궁 대신 별궁인 이곳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다시 역사의 주 무대에 등장했다. 당시 경운궁 주변으로는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공사관이 둘러싸고 있어 고종은 이곳이 빠르게 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적절한 위치라고 계산했던 것 같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양식의 석조전(石造殿) 건립을 명한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이오니아식 기둥과 왕가의 문장인 오얏꽃을 새긴 중앙의 페디먼트에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를 건립하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석조전 외에도 돈덕전(惇德殿),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眀殿) 등 '양관'이라 불리던 근대식 서양 건물도 여러 채 세웠다. 특히, 붉은 벽돌로 지은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1903년에 세운 건물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서양식 연회를 성대하게 열어 대한제국의 위상을 알리고, 서구 열강들에게 우리가 중립국임을 승인받고자 했으나, 콜레라가 창궐하여 그마저 무산되고 만다. 여러모로 역사는 고종의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헤이그로 3명의 특사를 파견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에 의해 고종은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그 뒤를 이어 2대 황제로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옮겨간다. 이때 경운궁에 남게 되는 아버지를 위해 순종은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의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는데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다. 1910년 마침내 석조전이 완공되었으나, 그 해에 대한제국이 멸망한다. 그리하여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주 업무를 보는 정전으로 건립되었으나 단 하루도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석조전 (石造殿)
석조전 (石造殿) 1층 대식당
정관헌 (靜觀軒) 미니어처
돈덕전 (惇德殿)

교과서에서 배운 고종은 자신의 아내와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사람이며, 기껏해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이나 가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당한 무능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친일 학자들의 식민사관이 반영된 역사교육을 받은 탓일 것이다. 하지만, 덕수궁과 그 일대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살펴보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고종은 서양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 속에 당당하게 중립국임을 선포하고자 했고,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간을 후원하고, 덕수궁의 북쪽과 경희궁의 남쪽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양쪽 궁을 오가며 여러 업무를 처리하기를 원했을 만큼 자신의 백성을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꿈을 꾸었던 군주였다. 13년의 짧았던 대한제국의 역사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덕수궁 연보>

1593년 임진왜란 후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선조의 임시 궁궐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칭함

1608년 석어당에서 선조 승하

1611년 광해군 창덕궁으로 이어.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칭함

1623년 인조반정. 즉조당에서 인조 즉위

1897년 고종 대한제국 선포

1903년 돈덕전 건립

1905년 중명전에서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바꿈

1910년 석조전 완공. 국권 피탈

1919년 함녕전에서 고종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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