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어디를 가도 길거리에는 노란 은행잎이 춤을 춘다. 마치 노래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를 영상으로 옮기면 요즘의 샛노란 은행나무와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발에 밟혀 짓이겨진 열매를 보면 '냄새가 고약하긴 해도 저게 진짜 맛있는 건데'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결혼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 뒷마당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매년 추석에 가족이 다 모이면 아버지는 '은행 털러 가자' 하셨다. 은행을 줍는 일은 몹시 귀찮기도 하고, 열매의 냄새가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라 나는 툭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곤 했다.
우리 가족이 은행열매를 수확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써서 혹시라도 머리나 어깨에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다음은, 두꺼운 목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비닐장갑을 두 장 이상은 껴야 한다. 그럼에도 손에 구릿한 똥냄새가 남아있기 예사다. 마당으로 나간 아버지가 긴 장대로 나뭇가지를 털면 노랗게 익은 열매가 후드득후드득 바닥에 떨어진다.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수북한 은행잎 사이에서 열매만을 골라 각자 봉지에 주워 담는다. 하루나 이틀에 걸쳐 온 가족이 열매를 주우면 커다란 쌀포대에 한가득 채워진다. 진짜 일은 이때부터이다. 모은 열매를 대야에 담고 물을 부어 주무르고 비벼서 냄새 고약한 과육 부분을 여러 차례 문질러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워낙 고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엄마 아버지는 우리에게 시키지 않고 두 분이서 하셨다. 그렇게 깨끗하게 씻고 나면 뽀얀 씨앗만 남은데, 이걸 또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그렇게 갈무리한 은행은 냉동보관을 했다가 몇 알씩 꺼내 겨우내 입이 심심한 밤에 간식으로 먹거나 요리의 고명으로 쓰는 것이다. 호두 까는 집게나 작은 망치로 껍데기를 깨고 연두색의 알맹이만 꺼내 마른 프라이팬에 살살 볶으면 속껍질 보늬마저 훌렁 벗겨진다. 이때 소금 한 꼬집을 살살 뿌리고 집어먹는 은행은 쫀득하면서 쌉싸름한 훌륭한 술안주가 된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그 노란 열매에서 이렇게 맛있는 알맹이가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계속 손이 가 자칫하면 과하게 먹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몇 년 전, 싱가포르에서 친구가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가을의 'falling leaves'를 꼭 보고 싶어 이 계절에 왔다고 했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호텔에서 가깝고 규모가 작아 둘러보기 쉬운 덕수궁에 데려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고 빨간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거리며 눈처럼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다가 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진 열매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ginko fruit'이라고 알려주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은행열매를 먹어만 봤지 나무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신기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은행을 주워가서 자기 나라의 친구들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너라면 그것에 손도 대지 않겠어!'라고 경고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은행 몇 알이 달린 작은 가지 하나를 집어 호텔에서 챙겨 온 냅킨에 곱게 싸서 핸드백에 넣고 있었다. Oh! No!!! 내가 후회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무에서 이제 막 떨어져 '프레쉬'한 이 열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그녀는 그것이 대추처럼 마를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았다. 이윽고 궁을 다 둘러보고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을 때 그녀가 물었다. '어디서 poo냄새가 나지 않니?'라고, 나는 '네 가방을 살펴봐"라고 대답했다. 여러 겹으로 꽁꽁 싸 두었던 은행은 그새 터져 냅킨마저 찢어져 있었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They smell horrible!"이라 외치고는 열매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녀의 핸드백 안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지금도 가끔 그녀가 그때 얘기를 할 때면 우리는 배꼽이 빠져라 한바탕 웃곤 한다. 그 핸드백을 어떻게 했나 궁금하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