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시작했다.
서점을 주기적으로 들를 때마다 평대에 필사 관련 책들이 놓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저런 책을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책을 읽는 것도 잘 하지 않는데, 노트에 글씨로 옮겨 적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필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디지털화된 사무환경에서 일하면서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쓸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고, 간단한 메모도 가까이 있는 휴대전화와 태블릿 기능을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필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얼마 전 일이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글쓰기 연습을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책을 출판하기 위해 문장력을 높이고 싶거나, 블로그 글을 더 잘 써보고 싶다는 둥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 모든 글을 보고서처럼 쓰는 것을 고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글솜씨가 늘어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보고서로 오랜 시간 굳어진 글쓰기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다른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필사 모임에 참여했다.
막상 필사를 시작하려니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는 게 많았다. 필사할 도서는 이미 모임에서 지정해 주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필사하려면 근사한 노트가 하나쯤 있었으면 했고, 글쓰기 편안한 필기도구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준비하는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집에 있는 것 아무것이나 활용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언제 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먼지 쌓인 노트와 쓰지도 않고 모여있는 볼펜을 찾아 글쓰기를 시작했다.
책 그대로 글만 잘 따라 쓰면 될 거로 생각했었지만, 필사를 시작해 보니 처음부터 실수가 잦았다. 작게는 단어를 틀리게 적거나 띄어쓰기를 틀리는 일도 있었다. 애교 수준이었다. 한 문장을 통째로 빼먹거나, 동일한 문장을 두 번 쓰는 큰 실수도 있었다. 실수가 반복될 때마다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실수를 줄이려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이라도 산만함에서 벗어나야 했다. 휴대전화를 끄거나 편한 카페를 찾는 등 다양한 시행착오를 해봤다. 필사하는 동안이라도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차츰 실수가 줄었다. 잘못된 띄어쓰기, 쉬운 말이 있는데도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거나, 문장을 길고 복잡하게 쓰는 습관들도 필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실수담도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어느덧 일곱 번 째 주를 지나간다.
필사한 것을 사진을 찍어 서로에게 공개하다 보니 글씨체부터 가장 걱정스러웠다. 남에게 보여줄 만한 글씨체가 아니었다. 필사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보다 마음이 더 쓰였다. 직장에서 마지막 일을 마칠 때쯤에는 더욱 손 글씨체가 망가져 있었다. 메모를 한다고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나조차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결재 서류에 필요한 서명 이외에 몇 년간 펜으로 글씨를 제대로 써본 기억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필사하기로 한 새 노트에 제목부터 적어본다. 글씨가 맘에 들지 않는다. 다른 글씨체로 몇 글자를 다시 적어본다. 역시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쓰이는 필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편하게 쓰이는 글씨체를 기억해 냈다. 손에 익은 글씨체는 미치코의 글씨체였다. 사랑했던 여자의 글씨. 회사 술자리였다. 테이블 밑에서 몰래 내 손을 잡았던 여자. 그 따뜻함에 반해 20대의 마지막쯤에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된 그 여자의 글씨체는 예쁘기보다는 독특했다. 나는 그 글씨체가 마음에 들었고, 그 여자의 글씨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의 글씨체는 결국 나의 필체로 굳어졌다. 안타깝게도 그 여자와의 인연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 여자의 기억과 함께 글씨체도 함께 잊혀져갔다. 헤어짐이 원인은 아니었다.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는 일이 많아 지고, 급한 메모 등으로 글씨가 날아다닐 듯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인연이라 생각했었는데, 필사를 시작하면서 그 여자의 글씨가 소환되었다. 필사가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그 여자를 불러냈다. 바다를 쓰면 그 여자와 함께 거닐었던 바다가 떠올랐다. 바람을 쓰면 바람에 흩날리던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생각났다. 도시 이름을 쓰면 그 도시에서 그 여자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밀려왔다. 필사를 할 때마다 그 여자는 늘 함께 였다. 내게 남겨진 그 여자의 흔적. 영원히 기억해 주길 바라듯 남기고 간 이별 선물은 아닐까?
나도 미치코에게 남긴 이별 선물이 있을까?
지금의 행복 속에서 그 마지막 선물은 영원히 잠들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