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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여우 Oct 04. 2023

버려진 것들의 고독

 K 선배와 인덕원에서 약속이 있었다. 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 몇 년 전 먼저 회사를 떠난 선배다. 언제나 합리적인 충고와 조언으로 회사생활의 방향을 잡아주던 선배였다.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화 너머 선배의 목소리에서 걱정과 응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하면 주변 사진을 찍어 보겠다고 여유 시간을 충분히 두고 집에서 나왔다. 억지로라도 새로운 취미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부터 시작해본 사진찍기였다.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음 정차역이 미아역이라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듣고 나서였다. 환승하면서 방향을 확인하지 않고 생각 없이 열차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출장 등으로 익숙했던 대로 발걸음이 움직였나 보다. 서둘러 반대편 방향 열차로 옮겨 탔지만, 약속 장소에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열차는 지연됨 없이 달려 주었고, 가까스로 시간을 맞추어 인덕원역에 도착했다. K 선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선배가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몰라 거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각각의 건물에서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있었다. 그 속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이라 생각하면서도 낯선 시선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로수 옆에 놓여있는 물건에  눈길이 갔다. 오래된 모니터였다. 둥글둥글한 화면을 가지고 뒤가 길쭉하게 튀어나온 것이 제법 무게가 있어 보였다. 지금처럼 얇고 평평한 제품이 사용되기 전까지 쓰이던 모델이었다. 흔히 쓰이던 일반모델들과는 다르게  하늘색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모양도 특이했다. SF 영화 속 작은 인공지능 로봇을 떠올릴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출시해서 판매되는 시점에서는 최신 디자인으로 인기가 제법 있었을 법했다.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어 먼지가 만들어 낸 얼룩과 상처의 흔적에도 귀엽고 세련되어 보였다.

 모니터가 있는 곳은 쓰레기를 모아두는 장소도 아니었다. 거리 한편 가로수 옆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래된 모델이라 주변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엄마의 손을 놓치고 길을 잃은 아이, 낯선 도시에서 가야 할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하루아침에 머물던 집이나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도 생각되었다. 누군가 집으로 안내해 주길, 누군가 가야 할 곳을 알려주거나 새로운 거처와 일할 곳을 안내해 주길 바라는 모습 같았다. 어제까지도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능숙히 자기 몫을 다 하고 있었을 텐데, 하루아침에 왜 여기에 있게 된 것일까?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었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서 느껴지는 고독.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찰칵. 고독을 찍는다. 한 장, 두 장 고독을 담는다. 낯선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찍어주고 싶었다. 고독이란 이름 속에 가려져 있는 이전에 가졌던 아름다움과 가치까지도 담아주고 싶었다. 다시 한번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다시 한번 사용될 수 없다면, 사진 속에서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고독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고 싶었다.

 이후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버려진 것들의 고독을 사진으로 담아보기 시작했다. 버려진 것들은 낯선 곳에 있거나,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도시의 골목, 산이나 바다 어디에도 있었다. 늘 고독을 만난다. 버려진 것들을 마주치게 되면 이전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 있지만, 버려진 것들의 가장 열정적인 시절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누군가에게 만족을 주며 살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 주기를 바라면서, 잊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누군가의 선택으로 다시 멋지게 부활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셔터를 누른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난 뒤 얼마 후에 선배가 도착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마지막 기억보다 선배의 얼굴에 나이가 보였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퇴사한 회사에서 함께 했던 추억. 회사에 대한 아쉬움. 그간의 생활. 수다스러울 만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화 중에 선배는 얼마 전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제는 나이를 먹는 것보다 찾아주는 곳이 줄어드는 것이 두렵다고, 잊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너도 곧 그걸 느낄 거야”

선배의 말이 아직은 완전하게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말은 아프게 들렸다. 문득 선배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배와의 시간을 멋지게 기억할 수 있도록 찍어두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잊히지 않도록. 아직 우리가 버려졌다고 느끼기 전, 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았다.


선배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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