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가 차를 가진다는 건,
첫 번째 집
(*<서른인데 뭐하지> 1월 - 처음 주제>
2018년 연말, 20대의 마지막 달을 지나던 시점. 일상에선 쓴맛이 났고 통장에선 단맛이 났다. 방송국 2곳을 돌아다니며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는, 반드시 자정을 넘겨야만 끝이 났다. 그때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말을 믿지 못하게 됐던 것 같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였다. 물 쓰듯 썼던 택시비, 마감에 쫓겨 보이는 카페마다 들어가서 버린 커피값, 또...
아, 아메리카노를 3잔 이상 마시면 헛구역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디든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분노와 불안은 고스란히 내 방까지 따라왔고, 협소한 4인 가구의 공간에선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이 가득했다.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엄마가 꼭 방문을 두드렸다. 좁은 집에서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다니, 라고 생각하셨나요? 죄송하지만 그때의 저는 정신머리라는 게 없었답니다.
사람이 극으로 몰리면 가장 먼저 머리가 터지고 그 다음으론 지갑이 열린다. 이성과 인내를 상실한 뇌는 가장 큰 자극 앞에서만 반응한다. 나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모든 것과 차단된 공간을 욕망했다. 그리하야 그 겨울, 나는 차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천만 원 정도만 있으면 경차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시작은 분명 그랬는데 정작 인수한 차는 그것보다 천만 원 이상 비싼 차였다. 혹시 대리점의 농간이 아닐까? 라고 긴장감을 주고 싶지만(....) 이왕이면 호상으로 가고 싶었던 나는 거액의 빚을 내며 조금 큰 차를 구매하게 됐다. 당시로서는 7년 만의 운전대를 잡는 상황이었기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 돈으로 산 가장 비싼 물건, 그것이 채워주는 충족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택시 안에서 바라보던 도로의 풍경과 초보운전자의 시선으로 본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빌런이자, 최약체의 존재로 30분의 시간에 걸쳐 집까지 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후회였다. (차도 반품이 되나요?)
차 안에 앉아 한참 생각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활시위를 떠나버린 화살, 그리고 결제해버린 차.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든 건 나였다. 인간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고, 나에겐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지금 막 그 갈증을 해소했는데 이걸 버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차는 30년 만에 온전히 처음 갖게 된 나의 집이었다. 엄마와 탯줄로 연결되지 않았고 아빠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공간. 내 의지가 있어야만 문이 열리고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마 이런 운전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판타지가 일상이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일상이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생겼다. 나의 집을 갖는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상상하는 것도 주제넘다 생각했던 과거들이 모두 흩어져 1,580kg의 차 안에서 새로운 일상을 써내려갔다.
올해는 이 첫 번째 집과 함께한 지 4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이곳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언어를 익히고 기록을 남기고, 친구를 사귀고, 때로는 먼 곳에 흔적을 남기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제야 나는 조금 자란 것 같다.
돌아갈 곳이자, 학교이자, 은신처이자, 나의 출발점.
단 한 번도 당연하지 않았던 나의 첫 번째 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