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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J Sep 21. 2023

바다와 여자, 외면당한 이름을 되찾기까지

영화 <밀수> 

  언젠가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출연진이 <한사랑 산악회>와 관련한 인터뷰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본인들이 ‘산악회’를 주제로 콘텐츠를 만든 건 산악회와 관련한 불손한 내용들을 지우고,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주기 위함이었다고. 같은 맥락으로 박찬욱 감독 역시, 영화 <아가씨>의 대본집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현대에 와서 아저씨들이 앞장서 오염시킨 그 명사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돌려주리라”      

  두 콘텐츠의 성공으로 이제는 ‘아가씨’나 ‘산악회’ 의 검색 결과에 불쾌한 이미지가 뜨는 일이 크게 줄었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가 등장했다. 해양범죄활극, 영화 <밀수>다. 영화나 문학작품 속 바다의 주인공은 언제나 남자였다. 캡틴, 마도로스, 해적, 어부, 누군가의 아버지 등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남성들이 바다를 지배했고 삶의 철학을 논했다. 반면 여성과 바다는 어떨까.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인어공주,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어떤 여자의 뒷모습, 해적에게 납치된 귀족여성... 그 이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라는 배경 앞에 여성들은 늘 보조적인 역할로 존재해 왔던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며 커왔던 내게 영화 <밀수>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주축, 아니 전부인 해녀들이 다 해 먹는 영화는 첫 장면부터 내가 갈망했을 지도 모르는 것들을 모두 보여주었다. 

     

  군천이라는 작은 항구도시, 열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작은 배, 그리고 수트가 아닌 전통 해녀복을 입은 채 맨몸으로 바다에 빠져드는 해녀들, 끝 모를 바다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해산물을 캐낼 때까지 몇 번이고 물질을 반복하는 모습... 


  바다에 뛰어들어 본 사람은 안다. 바다는 물에 뜨는 것보다 가라앉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바다에 뛰어들 때의 두근거림, 약간의 공포, 그것을 이겨내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그 어떤 장비 없이 물속으로 빠져드는 해녀들은 그 자체로 억척스러움과 강한 힘을 보여줬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끝까지 여성과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가족을 잃어도,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해도 목숨을 위협받아도 해녀들의 물질은 계속된다. 해녀가 아닌 여성 인물, ‘옥분(다방주인)’ 마저 언니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가.      


  결국 바다 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캡틴’의 이름은 영화 속 주인공인 ‘진숙’에게 돌아간다. 광활한 바다를 누비며 시원스레 웃는 여성들의 미소는 바다의 짠맛보다 더 진하게 남았다.     


    바다 위에서는 바다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직접 들어간다 해도 날씨에 따라, 조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기에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다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은 많은 것들을 바다에 숨겼다.      


  그 속에서 이 영화를 미끼로 한 가지 사실을 캐냈다. 바다는 여성을 배척한 적이 없었다. 누구의 편을 들어준 적도 없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외면했을 뿐이었다. 물론 나와, 당신이 발견한 것들이 비싼 값에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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