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리멘탈>은 본편 시작 전에 단편 <더그의 일상:칼의 데이트>를 상영하였는데, 그 작품이 제법 인상 깊었다. 픽사의 전작 <업>의 주인공인 '칼'이 그의 부인 '엘리'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누군가와의 데이트를 준비하는 내용이다. 아주 오랜만에 발생한 연애 기류에 한껏 들뜬 칼은 반려견 '더그'에게까지 의견을 물어가며 설레는 데이트를 준비한다.
칼은 데이트가 난생처음인 양 어색해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데, 그 과정이 꽤나 귀여워 보인다. 거실을 데이트 상대에게 줄 선물 상자로 가득 채우거나, 온몸에 향수를 들이붓다시피 해 더그의 코를 괴롭힌다. 평소는 잘 쓰지도 않는 예술, 경제 등의 전문 용어를 공부하는 어설픈 모습은 마치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년 같기도 하다. 완벽한 데이트를 계획하던 그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 시작하는데, 종국에는 백발에서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고 더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때 더그가 말했다.
"너는 왜 네가 아니야?"
<더그의 일상 - 칼의 데이트>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이 의식될 때 자기 자신을 꾸미기 시작한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거나 실제 내 모습보다 나아 보이고 싶을 때, 혹은 누군가가 요구하는 특정한 모습이 있을 때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 어쩌면 본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여야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열심히 꾸며서 얻어 낸 애정과 관심의 끝에는 허무함이 뒤따라 오곤 한다.
내가 나로서 사랑받을 수는 없을까?
<엘리멘탈>
<엘리멘탈>의 '엠버'는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고, 꾸며낸다. 가게 누수의 원인을 알면서도 부모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법을 찾으려 애쓴다. 물 원소 '웨이드'의 사랑 고백을 받고 벅차올랐지만 동시에 '물'을 혐오하는 제 부모가 떠올라 그 사랑을 부정해 버린다.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찾고, 가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음에도 쉽사리 그 뜻을 부모에게 전하지 못한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한 엠버는 "나는 왜 착한 딸로 살지 못할까?"라며 자책한다. 착한 딸이 아닌 "Bad Daughter"로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에 부모가 만든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자 스스로를 가두고 속인다. 마치 그녀가 만든 유리구슬 속의 꽃처럼 갇혀 있는 모습이다. 영화의 감독이 이민자 한인 부모 세대의 '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고생한 부모의 밑에서 자란 자녀는 부채감을 껴안고 자라기 마련이다. 부채감에 의한 '효심'은 정서적 독립에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게 얼마나 무겁고도 고된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
<엘리멘탈>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모양의 퍼즐로 태어난다. 애석하게도 이 조각은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이들은 꽤 긴 시간 동안 제 자리를 찾기 위한 여행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난 곳이 내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웨이드는 말했다. '내 흐름에 맞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라고. 방황하는 자는 적어도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첫 단추를 꿰었다. 이 고민이 없다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엠버와 웨이드의 자아 찾기를 통해 나답게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혹은 나답게 살면 온 세상에 외면당할 듯 두렵더라도, 오직 나 하나만큼은 나 자신을 보살피고 가꿔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리하면 내 속의 비비스테리아*도 언젠가는 밝게 웃으며 피어날 테니.